NASA의 화성탐사 미션을 지켜보고 있는 피로즈 나데리 박사 /NASA

<홀 오브 페임(Hall of Fame)>

지구와 우리 삶을 바꾼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발자취를 다룹니다.

이들의 한 걸음이 인류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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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흔히 이민자의 국가라고 합니다.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지만) 미국을 개척한 선조가 영국 이민자들이었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몰려든 수많은 인재가 현재 세계 최강국을 만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장됐다고 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미국은 물론 지구인의 영역을 지구 밖으로 확장하는 데 이바지했던 이민자 출신 과학자 한명이 지난달 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로 미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의 피로즈 나데리(Firouz Naderi) 박사입니다. 지난 5월 그는 페이스북에 “넘어져 목 아래가 마비됐다”면서 “인생은 참 알 수 없다”고 썼습니다. 이란 출신인 그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달 너머 심우주(深宇宙·Deep Space)로 인류를 데려갔습니다. 총 다섯 차례에 걸쳐 화성 임무를 이끌었고, 두 번은 탐사 로버(rover)를 화성에 착륙시켰습니다. 특히 2004년 스피릿(Spirit)과 오퍼튜니티(Opportunity)의 화성 착륙은 지난 수십년간 NASA가 이뤄낸 수많은 성취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힙니다. 그의 업적 덕분에 단순히 붉은 행성이자 우주인의 고향으로 여겨졌던 화성은 이제 인류의 미래 거주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나데리 박사는 많은 이란인과 이란계 미국인에게 이민자가 미국에서 얼마나 멀리 도달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면서 “그는 이란의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었고, 많은 젊은 이란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했습니다.

◇이란 혁명으로 도미

NASA의 화성 탐사 미션을 총괄한 피로즈 나데리 박사 /나데리 트위터

나데리 박사는 1946년 3월25일 이란 쉬라즈에서 부유한 지주 카림 나데리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테헤란에 있는 로마 카톨릭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나데리는 뛰어난 학생이자 수학 천재로 불렸습니다. 1964년에는 이란을 떠나 아이오와 주립대에 입학해 전기공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디지털 이미지 처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의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는 본인조차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공무원이 된 그는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미국의 전 지구 지리감시 위성인 랜드샛(Landsat) 데이터를 활용해 이란의 천연자원을 모니터링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자 서구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고, 나데리 박사는 로스앤젤레스로 도망쳤습니다. 이후 NASA JPL에 통신 담당 엔지니어로 고용됐습니다.

◇NASA의 화성 탐사 실패

1999년 화성 착륙에 실패한 화성 기후 탐사선 /NASA

1999년 NASA에는 우주왕복선 폭발사고에 비견될 만한 대참사가 연달아 일어납니다. 우선 4200억원을 투입한 화성 기후 탐사선(Mars Climate Orbiter)이 궤도 진입 이후 행방불명됐습니다. 조사 결과 엔진 추력을 계산한 록히드마틴과 이를 프로그램에 입력한 NASA가 각기 파운드와 kg이라는 다른 단위계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록히드마틴이 건넨 수치를 NASA가 환산 없이 그대로 사용하면서 오류가 발생한 겁니다. 황당한 사고였죠. 그해 말에는 2000억원 넘게 투입한 화성 극지 착륙선(Mars Polar Lander) 역시 대기권 돌입 이후 실종됩니다.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는 화성 지표로 강하 중에 전개한 착륙선의 다리에서 발생한 진동을 탐사선의 소프트웨어가 지표 착륙 때의 충격으로 착각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 결과 착륙과 동시에 분리해야 하는 강하 엔진이 40m 상공에서 분리됐다는 겁니다. 일각에서는 추진기의 연료가 충분히 가열되지 않아 불안정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화성 기후 탐사선과 화성 극지 착륙선은 쌍둥이 프로젝트였습니다. 두 프로젝트가 모두 실패하면서 NASA는 엄청난 책임론과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화성의 신비 밝힌 쌍둥이 로버

오퍼튜니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0년 나데리 박사가 화성 탐사 책임자가 됐습니다. 당시 그는 지구에서 초기 생명체의 형성을 규명하고 외계 행성에서 생명체의 흔적을 찾는 ‘오리진(origin·기원)’ 프로그램의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2001년 발사된 마스 오디세이(Mars Odyssey)가 그의 첫 화성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우주선은 아직도 화성 궤도를 돌고 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NASA에 따르면 마스 오디세이는 지구 이외의 행성 주위를 도는 가장 오래 지속된 우주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쌍둥이 로버인 스피릿과 오퍼튜니티는 더욱 놀라운 성과를 거뒀습니다. 두 로버는 각기 90일간의 임무를 위해 설계됐는데, 정작 스피릿은 6년, 오퍼튜니티는 15년간 화성 표면을 탐사했습니다. 두 로버는 화성이 한때 더 따뜻하고 습한 행성이었고, 생명체가 살았을 가능성도 제시했습니다. 화성이라는 행성에 대해 관찰과 계산만으로는 알 수 없는 직접적인 증거들은 지구인들에게 알려준 겁니다. 나데리 박사는 후일 첫 로버가 착륙한 순간의 감동을 떠올리며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란 인권과 민주주의의 옹호자

화성 탐사 로봇 ‘스피릿’이 1200만화소의 파노라마 카메라로 촬영한 화성 표면의 컬러 영상.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공개한 이 사진에서 화성의 황토색 흙과 파란색이 감도는 암석들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보인다.

나데리 박사는 화성 로버를 언제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다루고 대했다고 합니다. 스피릿이 화성을 향하는 동안 그는 스피릿을 ‘모든 팔다리가 단단히 접힌 어머니의 자궁에 있는 아이 같은 상태’라고 표현했습니다. 로버가 착륙하면 팔다리가 마치 태어난 직후의 아기처럼 펼쳐질 것이고, 휴식 모드에 있던 로버가 ‘잘 잤다’며 깨어날 것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나데리 박사는 평생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란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2000년 화성 탐사 책임자를 선정하는 고위직 면접에서 그는 “이번에 우리가 실패하면 언론 헤드라인에 ‘NASA가 이란 출신 관리자 밑에서 화성에서 다시 실패했다’고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더 필사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항상 “이란 과학자와 대학생들의 어린 마음에 동기부여를 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란 인권과 민주주의의 열렬한 옹호자이기도 했습니다. 201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이란 드라마 ‘세일즈맨’의 아스가르 파라디 감독을 대신해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이란계 미국인 아누셰 안사리와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지구는 경계 없는 푸른 구슬”

201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란 드라마 ‘세일즈맨’의 아스가르 파라디 감독을 대신해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이란계 미국인 아누셰 안사리와 함께 무대에 선 피로즈 나데리(왼쪽). /네이버

그가 은퇴하자 NASA는 소행성에 그의 이름을 붙이며 공로를 기렸습니다. 나데리 박사는 “내가 떠나더라도 수십억년간 태양 주위를 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지난 1년간은 이란 정부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이 정부의 제한 없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도록 저궤도 위성 인터넷 서비스인 스페이스X의 ‘스타링크’ 위성 수신기 100대를 구입해 전달하는 활동을 주도했습니다. 또 이란계 미국인 공보 연합 및 각종 단체에서 이란 및 이란계 미국인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면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하나의 푸른 구슬처럼 보입니다. 경계도, 선도, 사람들에 대한 구분도 보이지 않습니다.(”Once you go away from the Earth into space, and you look back at the Earth, you see it as a single blue marble, You see no borders, no lines, separating peo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