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후반에 찍은 헨리에타 랙스(왼쪽). 오른쪽은 헨리에타 랙스에게서 채취해 지금도 의학용으로 활용되는 헬라세포. 세포의 특정부분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특수 염색 처리했다./헨리에타 랙스 재단

전 세계 실험실을 떠돌며 백신 개발과 의학 연구에 기여한 ‘불멸의 세포’가 70여 년 만에 법적 권리를 인정받았다.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는 1일(현지 시각) 헨리에타 랙스라는 흑인 여성의 세포를 무단으로 채취해 연구실에 판매한 바이오 기업 서모 피셔 사이언티픽이 랙스의 유족에게 보상을 해주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합의 조건은 공개되지 않았다.

1951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살던 다섯 아이의 어머니 랙스는 복부 통증과 이상 출혈로 존스홉킨스 병원을 찾았다. 당시 이 병원의 산부인과 의사들이 발견한 것은 자궁경부에 생긴 커다란 종양이었다. 랙스가 자궁경부암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의사들은 그의 동의를 받지 않고 종양의 세포 샘플을 채취해 실험실로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몸 밖으로 나온 세포는 며칠 내 사멸했지만, 랙스의 세포는 살아남아 증식했다. 실험실에서 배양한 최초의 인간 세포인 셈이다. 랙스의 이름과 성에서 각각 두 글자를 딴 ‘헬라(HeLa) 세포’ 혹은 불멸의 세포라고 불렸다. 당시 서른한 살이었던 랙스는 그해 흑인 분리 병동에서 사망했고, 무연고 무덤에 묻혔다.

주사전자현미경(SEM)으로 찍은 헬라 세포의 분열. /미국국립보건원(NIH)

존스홉킨스 병원은 헬라 세포를 여러 실험실로 보냈다. 연구자들은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어떻게 세포를 감염시켜 질병을 일으키는지 연구하는 데 이 세포를 사용했고 백신까지 개발했다. 헬라 세포 연구는 암, 파킨슨병, 독감 등의 질병에 대한 치료법 개발로 이어졌고 노화의 원인 규명에도 사용됐다. 미국 국립보건원에 따르면 헬라 세포는 전 세계 연구자들에 의해 사용됐으며 지금까지 11만 건 이상의 과학 논문에서 인용됐다.

랙스의 유족은 연구기관과 바이오 회사들이 불법 채취한 세포를 사용하거나 세포사용법 특허권을 받았다는 것을 1973년에야 알았다. 연구기관으로부터 혈액 샘플을 요구하는 전화를 받는가 하면 가족 병력이 의학 논문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랙스와 헬라 세포 그리고 유족의 이야기는 2010년 출간된 레베카 스클로트의 저서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오프라 윈프리가 출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책과 영화로 얻은 수익금은 헨리에타 랙스 재단 설립에 쓰였다. 2020년 미국의 하워드 휴스 의학연구소(HHMI)는 헬라 세포를 사용한 대가로 헨리에타 랙스 재단에 수십만 달러를 냈다.

유족은 2021년 헬라 세포를 배양해 전 세계 실험실에 판매했던 서모 피셔 사이언티픽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회사가 헬라 세포를 이용해 엄청난 수익을 올렸지만 랙스의 유족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서모 피셔 사이언티픽은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며 소송을 기각시키려고 했지만 유족은 “세포는 랙스 그 자체이며 세포가 여전히 복제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 소송은 2년 만에 합의에 다다랐다. 유족 측 변호인은 “앞으로 다른 기관과 회사를 상대로도 소송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