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DNA를 이용해 염기서열 공백을 메워 완벽한 유전자 코드를 완성했고, 이렇게 아기 공룡이 태어난 겁니다.”

1993년 개봉한 SF영화 ‘쥐라기 파크’에서 공룡 복제 방법을 설명하는 대사다. 영화에서는 호박에 갇혀 있던 모기의 피에서 공룡의 DNA를 찾아낸 뒤, 소실된 염기서열 공백을 개구리 DNA에서 잘라 붙여 공룡을 만들었다. DNA 염기서열의 특정 부분을 자르거나 붙여 원하는 대로 편집하는 데 사용된 기술이 ‘유전자 가위’다. 이 중 3세대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카스9(CRISPR-Cas9·이하 ‘크리스퍼’)’은 ‘생명과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크리스퍼는 개발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크리스퍼 분야 석학 펑장 MIT 교수 연구팀은 최근 네이처를 통해 “동물에게서 새로운 크리스퍼 유사 시스템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박테리아 등 원핵생물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진 크리스퍼 시스템이 동물에게도 유사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찾아낸 것이다. 이정미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유전자교정연구센터 박사는 “동물에게서 찾아낸 크리스퍼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가위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했다.

그래픽=김현국

◇‘유도탄’과 ‘가위’를 합한 크리스퍼

크리스퍼는 세균의 방어 체계에서 비롯됐다. 세균이 외부의 바이러스에 공격받을 때, 바이러스의 DNA 일부를 조각내 자신의 크리스퍼 영역에 저장한다. 이후 같은 종류의 바이러스가 다시 공격하면 저장해 둔 DNA를 꺼내 바이러스를 추적하는 RNA을 만든다. RNA는 ‘유도탄’처럼 바이러스를 추적하고, 가위 역할을 하는 ‘카스9′ 효소로 침입한 바이러스를 제거한다.

크리스퍼도 마찬가지다. ‘가이드 RNA’를 만들어 편집을 원하는 DNA 부위를 찾은 뒤 카스9 효소로 절단하는 방식이다. 이전 세대 유전자 가위는 단백질 합성에만 1년이 걸리는 반면, 크리스퍼는 한 달 정도면 가이드 RNA를 만들 수 있어 적은 비용으로 빠르게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크리스퍼는 유전자를 자르고 붙여 ‘편집’할 수 있다는 면에서 유전자 변형 작물(GMO)과 비슷하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는 ‘외부 유전자 삽입 여부’에 있다. GMO는 외부의 다른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삽입해 유전자를 재조합하는 방식이다. 알레르기 등 인체 부작용을 유발하거나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크리스퍼는 생명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유전자를 편집하는 방식이어서 비교적 안전하다. 최근 유럽연합(EU)은 크리스퍼가 GMO와 달리 외부 유전자를 삽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크리스퍼로 유전자를 교정한 일부 작물을 일반 농작물과 동일하게 취급하도록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크리스퍼 유전자 교정 작물 판매가 허용됐다.

그래픽=김현국

◇인류 문제의 해답을 제시해 줄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는 지금껏 인류가 치료하지 못한 질병의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미 버텍스 제약과 스위스 크리스퍼 테라퓨틱스가 공동 개발한 ‘엑사셀’은 유전 질환인 겸상적혈구 빈혈 환자를 위한 유전자 교정 세포 치료제다. 환자의 혈액 줄기세포를 크리스퍼로 편집해 적혈구의 건강한 헤모글로빈을 증가시키는 방식으로 치료한다. 엑사셀은 올해 안으로 미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엑사셀이 FDA 승인을 받으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적용한 최초의 치료제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최근에는 ‘프라임 편집기’라 불리는 4세대 유전자 가위 연구도 활발하다. 크리스퍼는 DNA 이중 가닥을 모두 자른 뒤 세포의 자체 회복 과정을 활용해 유전자를 교정한다. 단점은 유전자의 엉뚱한 부분을 자르거나 교정이 불가한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프라임 편집기는 RNA에 표적의 정보와 함께 바꾸고자 하는 염기서열을 넣을 수 있다. DNA 이중 가닥 중 한 가닥만 자른 뒤, 동시에 새로운 유전 정보를 넣어 교정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 제네틱스’의 에디터 케빈데이비스는 “크리스퍼 기술이 분자 가위라면 프라임 편집기는 어떤 오자든 찾아 바꿀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라 했다.

☞크리스퍼-카스9(CRISPR-CAS9)

특정 유전자가 있는 DNA를 잘라 교정할 수 있는 유전자 가위. 표적이 되는 DNA를 찾아가는 ‘가이드 RNA’와 DNA를 자르는 ‘카스9’ 효소로 이뤄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