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적으로 감염병이 일어난 직후 5년에서 10년 사이에 또 다른 감염병이 발생할 위험이 있습니다. 감염병은 완전히 무작위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감염병X’에 대한 전지구적 대비 전략이 필요합니다.”
지난 15일(현지 시각) 독일 뮌헨에서 열린 ‘한-유럽 과학기술학술대회(EKC) 2023′에서 안드레 샬렛(Andre Charlett) 영국보건안전청 박사가 ‘대규모 감염병에 빠르고 영리하게 대응하는 법’에 대한 강의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감염병X는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코로나처럼 대규모 유행을 일으킬 수 있는 미지의 감염병을 뜻한다. 샬렛 박사는 전염병 등 질병 역학과 관련된 통계 분야에서 30여년을 일한 역학 전문가다.
코로나를 통해 감염병이 지닌 파괴력을 경험한 인류에게 감염병X는 ‘예정된 위협’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영국 정부는 지난 3일 국가가 직면한 89개의 주요 위협을 담은 ‘국가위협등록부(NRR)에 감염병X를 담았다. 하지만 감염병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만큼 대비하기 어렵다. 샬렛 박사는 “정부가 신종 감염병의 발생 가능성을 따져보니 가까운 미래 영국에서 감염병으로 인해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할 확률이 5~25% 수준”이라며 “매년 유행하는 독감마저도 변종을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만큼, 종과 종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감염병을 예측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감염병X의 정체를 미리 알 수 없지만 피해 최소화를 위한 대비 전략은 세울 수 있다. 샬렛 박사는 이를 위해 ‘초기 대응’과 ‘신속한 진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감염병이 어떤 증상을 유발하는지, 치명률은 얼마나 높은지, 어떤 연령대에서 자주 나타나는지 등을 알아내 방역 대응을 하려면 가장 먼저 진단을 통해 감염 여부를 빠르게 확정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진단으로 초기 100건의 감염 사례를 모을 수 있으면 해당 감염병의 정체를 밝히고 대응 방향을 결정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샬렛 교수는 “코로나 유행 초기에도 입원률, 에크모 유무, 치명률 등이 담긴 100건의 정보를 통해 코로나가 치명률이 높으면서 무증상 감염의 가능성이 있어 사회적 거리두기와 봉쇄 정책 등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 했다.
정확하고 신속한 진단은 백신이 나오기까지 피해를 최소화하며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 문제는 진단을 통한 방역 대응의 속도다. 영국 정부는 코로나 유행 초기 2년간 370억 파운드(63조원)의 예산을 들여 확진자 추적 조사(Test&Trace)를 시행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반면 한국은 확진자를 추적해 추가 감염 경로를 차단하며 확진자 수를 억제하는 정책으로 방역 효과를 극대화했다. 샬렛 박사는 영국에서 실패한 확진자 추적 조사가 한국에서는 성공한 이유로 ‘신속한 진단’을 들었다. 영국에서는 코로나 검사부터 판정은 물론, 양성 여부를 확진자에게 전달하는데도 5일이 넘는 시간이 걸리면서 그 사이 추가 접촉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격리와 접촉자 추적이 영국에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증상 감염 여부를 찾아내는데 방역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어 피해가 커졌다”고 했다.
그는 감염병X에 대비하기 위한 ‘100일 미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00일 미션은 국제기구 감염병혁신연합(CEPI)이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 감염병 대응 전략이다.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이 발생하면 질병을 분석해 대규모 백신 생산까지 100일 안에 완료해 피해를 최소화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백신 라이브러리와 임상 연구 네트워크, 감염병 조기 경보 시스템 등이 구축돼야 한다. 그는 “감염병X는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거나 어떠한 치료제도 효과가 없는 질병일 수 있다”면서 “전지구적 네트워크를 통해 관련된 모든 문제를 공유하고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했다.
[뮌헨(독일)=한국과학기자협회 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