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말 주요 외신들은 ‘올해의 주요 뉴스’로 일제히 세 가지 사건을 꼽았다. 모두 영국과 관련이 있었다.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사망, 홍콩의 중국 반환, 세계 최초의 복제 포유류 복제양 돌리의 탄생이었다. 1996년 태어난 돌리의 존재는 이듬해 2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 표지 논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돌리는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의 유전자(DNA)의 구조 규명과 함께 20세기 생명공학계가 만들어낸 최고의 성과로 평가받는다.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영국 과학자 이언 윌멋 박사가 지난 10일(현지 시각) 세상을 떠났다. 향년 79세. 윌멋의 돌리는 생명공학의 개념 자체를 바꿔 놓았다. 성체세포를 이용해 동물을 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완전히 똑같은 동물을 무한 생산할 수 있는 ‘클론의 시대’가 열렸다.
◇클론의 시대 연 돌리
영국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윌멋은 노팅엄대에서 동물학 학위를 취득한 뒤 케임브리지에서 멧돼지 정액 냉동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든버러 외곽의 로슬린 연구소에서 일한 윌멋은 1973년 냉동 배아에서 송아지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스타로 떠올랐다. ‘축산업의 혁명과 같은 일’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당뇨병을 앓던 아버지가 실명하자, 자신의 연구를 상업보다는 의학에 활용하기로 했다. 첫 연구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 양이었다. 윌멋은 “양은 스코틀랜드 어디에서 있었고, 가격도 저렴했다”고 했다. 윌멋은 1996년 7월 양의 성체세포를 이용해 100% 똑같은 암컷 복제양 돌리를 만들어냈다. 300번의 시도 가운데 단 한 개의 배아만 살아남았고 윌멋은 가수 돌리 파튼의 이름을 붙였다. 논문이 1997년 나온 것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리는 화제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성체세포로는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과학계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생명체를 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의 영역’과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하지만 이후 전 세계 연구자들은 소, 개, 코요테 등 수많은 동물을 복제하기 시작했고 유전자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줄기세포와 유전자 가위 기술도 급속히 발전했다. 안준모 고려대 교수는 “이론적으로는 사람도 충분히 복제할 수 있고, 이를 막는 것은 오직 윤리적 장벽만 남았다”면서 “줄기세포와 유전자 가위는 치료에 초점을 맞춘 기술이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했다.
◇난치병 치료와 생명 연장 열쇠
동물 복제와 줄기세포 등 생명공학을 이용한 난치병 치료와 생명 연장 산업은 전 세계가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전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누가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치료제를 개발하느냐에 바이오 시장의 패권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중반 한국은 생명공학의 최전선에 있었다. 세계 최초로 복제개 ‘스너피’를 만들었던 황우석 박사 연구팀은 2004년 사이언스에 세계 최초로 사람의 체세포를 복제한 배아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논문은 데이터가 조작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전 세계 과학계를 뒤흔든 스캔들이 됐다. 이 사건으로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는 긴 침체기를 겪었다. 한국이 황우석 사건의 트라우마로 주춤하는 사이 미국과 일본이 빠르게 앞서나갔다. 일본 교토대 야마나카 신야는 2006년 쥐의 피부 세포에 네 가지 유전자 조절 인자(일명 야마나카 인자)를 주입해 세포의 시간을 거꾸로 되돌렸다. 인체의 모든 세포로 자라나는 유도만능줄기세포(iPS)를 만들었다. 미국 오리건 보건과학대학은 2013년 황우석 박사가 실패했던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처음으로 수립했지만, 이미 줄기세포 시장의 주도권은 iPS 원천특허를 가진 일본이 가져간 뒤였다. 신야 박사의 원천기술을 활용한 미국 소크연구소는 조로증을 걸린 쥐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성공했다.
현재 생명공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에서는 미국이 가장 앞서있다. 효소의 일종인 유전자 가위는 원하는 유전자를 마음대로 잘라내고 이어붙일 수 있어 유전병을 비롯한 희귀 질환의 판도를 바꿀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미국 제약사 버텍스는 올해 빈혈환자용 유전자 교정 세포 치료제 ‘엑사셀’의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을 전망이다. 허가를 받으면 최초의 유전자 가위 치료제 상용화 사례가 된다.
뉴욕타임스는 “윌멋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단백질이 포함된 우유를 만들고 재생 의학에 사용할 수 있는 줄기세포를 만들고 싶어했다”고 했다. 윌멋의 돌리에서 시작된 생명공학 혁명이 이제 그의 꿈을 이뤄주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