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핵융합로 K-STAR와 중이온 가속기 라온 등 기초 연구 기반이 되는 주요 대형 연구 설비가 정부 R&D 예산 삭감으로 정상 가동이 어려워질 것이란 주장이 과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연구자들이 K-STAR 내부를 살펴보는 모습./신현종 기자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이 국회에 제출된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재조정하기로 했다. 지난 8월 예산안 발표 이후 갑작스러운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에 대한 과기계 반발이 확산되고 있는 데다 대통령실과 여당 내부에서도 예산 삭감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연구 현장 효율화를 위한 근본적 대안 없이 젊은 과학자를 대상으로 한 기초과학 예산과 정부 출연연구소 예산을 대폭 줄이는 바람에 과학계 혼란이 가중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래픽=김하경

◇번갯불 콩 구워먹듯 삭감 ”내용 살펴볼 틈도 없었다”

R&D 예산 삭감은 급박하게 진행됐다. 지난 6월 26일 과기정통부는 내년도 R&D 사업 예산안을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 제출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예산안 심의를 이틀 앞둔 6월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를 제로 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다급해진 과기정통부는 정부 출연연에 예산 재조정안을 요청했다. 한 출연연 관계자는 “과기부 담당자에게 금요일 저녁에 ‘기존 예산안에서 20%를 줄여 밤 12시까지 다시 제출하라’는 연락을 받았다”면서 “1년 가까이 준비한 예산안은 폐기되고 깎인 예산 범위에 맞춰 새 안을 마련하느라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고 했다. 두 달 만에 3조4000억원 규모 R&D 예산이 삭감된 새 예산안이 공개되자 과학계와 출연연은 혼란에 빠졌다. 정부 지원금으로 기초 연구를 진행하는 특성상 새로운 연구는 고사하고 기존 연구도 구조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특히 입자 가속기·원자로·핵융합로 등 기초 연구 기반이 되는 주요 대형 연구 설비의 경우 정상 가동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우주 기원 연구 목적으로 1조5000억원이 투입된 한국형 중이온 가속기 라온(RAON)은 최근 구축을 마치고 내년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R&D 예산 삭감으로 6개월밖에 가동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형 핵융합로 K-STAR는 최근 전력 요금 상승으로 일부 연구 계획을 축소한 가운데 예산 삭감으로 가동 횟수 자체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연구실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필수 예산도 깎였다. 연구 장비 구입이나 재료·분석에 들어가는 직접비 예산이 사라지자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10번 해야 할 실험을 5번으로 줄이란 것인가”란 불만까지 나왔다.

◇예산 삭감되면 젊은 연구자부터 피해

예산 삭감으로 연구 현장에서는 당장 인력 확보에 제동이 걸렸다. 구본경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 교정 연구단장은 SNS를 통해 “IBS는 거의 100% 정부 연구비에 의존하고 타 과제 지원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기 때문에 감원 압박이 있다”라고 했다.

연구 현장에서는 “정부가 R&D 효율화를 통해 젊은 과학자를 육성한다 했지만 예산 재조정의 최대 피해자는 젊은 과학자들”이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박사 후 연구원(포닥)은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주도적인 연구를 하는 시기다. 대학 연구실이나 출연연에서 비정규직 신분으로 일한다. 정규직과 달리 포닥의 인건비는 연구 책임자가 받는 과제비에서 충당한다. 한 출연연 박사는 “상당수 연구 책임자가 예산 삭감으로 포닥을 가장 먼저 내보낼 것”이라고 했다.

예산 삭감을 주도한 과기정통부에 대한 책임론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R&D 개혁 이야기는 꾸준히 있어 왔지만 출연연 등 연구 현장에서는 “과기정통부와 소통해본 적이 없다”라고 불만을 터뜨린다. 일부 공무원은 “출연연은 개혁 대상”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면서도 구체적인 방안은 마련하지도 않았다. 과기정통부 내부에서는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내용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숫자만 줄이는 예산 삭감을 서두르다 보니 현장 연구자들을 설득하는 절차도 무시됐다. 과기정통부 장관이 현장의 우려를 달래겠다며 젊은 연구자들을 여러 차례 만났지만 부처가 선택한 일부만 비공개로 만나며 반발만 샀다. 출연연 노조 등 10여 단체가 모인 과학기술계 연대회의는 성명을 통해 “비공개로 정부 입장을 설명한 뒤 우리나라 전체 과학기술 종사자들에게 동의받은 것처럼 포장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