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안을 둘러싼 정치권의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작 R&D 예산의 본질인 ‘과학 기술’에 대한 논의는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서로 비판에만 열을 올리며 예산의 적정성에 대한 고민 없이 ‘일괄 삭감’과 ‘일괄 증액’만 난무하는 형국이다. 과학계 안팎에서는 “국가 R&D 예산을 두고 정치 공방을 벌여서는 안 된다” “ ’100년 대계’를 세우는 관점으로 제대로 검토해야 한다”는 쓴소리가 나온다.

그래픽=김하경

◇출연연 연구비 증액에 포퓰리즘

14일 국회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 예산소위에서 의결된 예산안에서 민주당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운영비를 일괄 상향하고 학생 인건비 등을 증액했다. 앞서 여당도 이 부분을 일부 증액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는데 민주당은 기존에 삭감됐던 출연연 운영비를 고스란히 되살렸다. 특히 과학계에서는 이 과정에 표심 챙기기가 있었다는 말이 나온다. 과방위 야당 간사인 조승래 의원 등이 출연연과 기초과학연구원(IBS), KAIST 등 기관에서 증액 요청 리스트를 사전에 제출받아 그대로 반영했다는 것이다. 조 의원의 지역구는 대덕특구가 있는 대전이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출연연 운영비에는 여러 사업이 있는데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도 없이 지역 민원을 들어주는 식으로 예산안이 처리된 것 같다”며 “지금까지 R&D 예산이 급속히 팽창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비효율이 발생했다는 데 동의하는 입장에서 보면 증액을 하더라도 꼭 필요한 부분에 해야지 나눠 주기식은 안 된다”고 했다. 한민구 서울대 명예교수는 “R&D 예산에 포퓰리즘적 요소가 개입해서는 곤란하다”며 “세금을 쓰는 일인데, 누가 더 제대로 된 결과를 낼 수 있는지를 반드시 감안해서 거품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인건비로 활용되는 운영비를 민원으로 그때그때 해결해주다 보면 결국 예산 나눠 먹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최희규 창원대 메카융합학과 교수는 “단순히 운영비를 늘린다고 젊은 연구자 처우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연구소 운영비는 매년 달라지기 때문에 안정적인 지원도 아니다”면서 “여당이 보완책으로 꼽은 장학금 형태가 더 바람직하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국제 협력 예산 대거 삭감

민주당은 또 국제 협력 연구와 관련된 예산을 대거 삭감하고 이 금액을 모두 국내 연구실 지원으로 돌렸다. 앞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했던 예산안에는 올해 예산의 3배에 달하는 1조8000억원 규모의 국제 협력 예산이 포함돼 있었다. 야당은 이 중 ‘글로벌 선도 연구센터 개설’ 등 윤석열 대통령이 R&D 발전 핵심으로 꼽은 예산을 일괄 삭감했다.

전문가들은 예산을 편성한 정부와 여당도 빌미를 제공했다고 본다. 애초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짠 예산안이 두루뭉술하고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논란의 여지를 줬다는 것이다. 정부가 당초 배정했던 글로벌 선도 연구센터와 글로벌 기초연구실 사업은 기존에 있던 선도연구센터와 기초연구실 사업에 ‘글로벌’이라는 세 글자만 붙였다. 어떻게 예산을 활용해 세계적인 연구를 할지는 고민하지 않고 포장만 갈아 끼운 셈이다. 실제로 정부와 여당은 여러 차례 연구 현장 간담회와 공청회 등을 진행하면서도 구체적인 국제 협력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다만 민주당이 정부 방침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제협력 예산을 삭감한 것도 과학계 현실을 외면한 처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은 “이제 연구 개발의 방향이 세계를 목표로 나아가기는 해야 한다”며 “국제 협력 연구의 경우 1년 이상 시간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준비해야 하는데 전략도 없이 급격하게 관련 예산을 줄이거나 늘리면 연구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유욱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은 “국제 협력이 정말 필요한 부분이 있고 괜히 해외 연구 기관으로 자금이 나가기만 하는 정책도 있다”며 “이를 골라내는 것이 정부 역할”이라고 했다.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는 “(여야가) 서로의 안이 싫다며 ‘모 아니면 도’식으로 예산을 만지고 있다”며 “과학기술의 미래에 대한 정치권의 고민 자체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