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과학 학술지 네이처가 꼽은 ‘2023 과학계를 만든 인물(네이처10)’에 사상 처음으로 비인간(非人間·nonhuman)이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말 공개돼 전 세계에 인공지능(AI) 열풍을 몰고 온 오픈AI의 챗GPT가 그 주인공이다.
네이처는 14일 챗GPT를 네이처10에 선정하면서 “챗GPT는 과학계에 심오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며 과학자들의 연구 방식을 바꿔 놓았다”면서 “챗GPT 같은 시스템에서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생성형 AI 혁명은 시작됐고 이제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아직까지 한계가 있지만, 챗GPT를 활용하면서 전 세계 과학계가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효율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챗GPT와 개발자 동시에 선정
네이처는 2011년부터 매년 연말 네이처10을 발표해 왔다. 과학계에서 큰 성과를 냈거나 중요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이들이 선정된다. 네이처는 “일부 연구자들에게 챗GPT는 이미 귀중한 연구실 보조가 됐다”며 “이 프로그램은 원고를 요약하거나 작성하고, 애플리케이션을 다듬고, 코드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했다. 여러 생성형 AI 중에서 챗GPT를 선정한 데 대해서는 “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대규모 언어모델(LLM)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지만, 2022년 11월 챗GPT가 무료로 등장하면서부터 이 기술이 본격화됐다”고 했다. 또 “앞으로 AI가 새로운 분자를 설계하거나, 세포의 행동을 시뮬레이션하는 등의 연구를 하도록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네이처는 “챗GPT는 가짜 참고 문헌을 적고, 사실을 지어내고, 사기꾼과 표절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며, 악용하면 과학의 우물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럽힐 수도 있다”며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챗GPT의 아버지인 오픈AI 수석 과학자 일리야 수츠케버도 자신의 피조물과 함께 네이처10에 선정됐다. 네이처는 수츠케버에 대해 “챗GPT 의 개발자인 동시에 AI의 안전성을 고민하는 인물”이라며 “논란이 가득한 AI 시스템을 개발하고 그것이 사회를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했다. 수츠케버는 ‘현대 AI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힌턴 토론토대 교수의 수제자로 AI를 경계해야 한다는 신념이 강한 인물이다. 지난달 “지나치게 AI 상업화에 치중한다”는 이유로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를 퇴출시켰던 오픈AI 이사회 반란을 주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달 착륙부터 기후 변화 대응까지
네이처가 올해 ‘네이처10′에서 가장 먼저 이름을 꼽은 과학자는 칼파나 칼라하스티 인도 우주연구기구(ISRO) 박사다. 칼라하스티는 탐사선이 달의 위험 지형을 피하는 기능을 설계해, 지난 8월 인도의 찬드라얀 3호를 세계 최초로 달의 남극에 착륙시켰다. 수컷 생쥐 두 마리의 세포를 이용해 수정란을 만들어 생쥐를 탄생시킨 하야시 가쓰히코 일본 규슈대 교수도 이름을 올렸다. 이 기술은 멸종 위기 동물을 복원하는 데 활용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오젬픽, 위고비 등 올해 전 세계를 휩쓴 비만 치료제의 원리인 글루카곤 유사펩타이드(GLP-1) 초기 합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스베틀라나 모이소프 미국 록펠러대 교수도 주목받았다. 모이소프는 약품 개발 후 특허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등 소외돼 있다가 올해 적극적인 권리 찾기에 나섰다. 모이소프는 “내 성과가 인정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이라고 했다.
이 밖에 상온 초전도체를 개발했다고 주장한 랑가 디아스 미국 로체스터대 교수의 연구 부정을 폭로한 제임스 해믈린 미국 플로리다대 연구원, 핵융합으로 에너지 생산에 성공한 애니 크리처 미국 국립점화시설(NIF) 연구원, 중증 방광암 치료의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토머스 파울스 영국 런던대 교수, 말라리아 백신을 개발한 할리두 틴토 감염병데이터관측소 연구원도 네이처10에 선정됐다.
과학자가 아닌 인물도 두 명 포함됐다. 아마존 정글 보호를 위해 노력한 마리나 시우바 브라질 환경부 장관과 엘레니 밀리빌리 유엔 글로벌 최고 열 책임자(chief heat officer)다. 두 사람 모두 기후 변화 대응에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