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젠타 생명공학 센터의 메리델 칠턴 박사. 칠턴은 박테리아 연구를 통해 유전자 변형 작물(GMO)을 처음으로 개발해 농업과 식량 생산의 역사를 바꿨다. /신젠타

기원전 9000년 중동 레반트 지역에서 사람들이 최초로 농사를 지었다. 신석기 혁명 또는 농경 혁명이라 부르는 이 사건은 식생활은 물론 인류가 살아가는 모습과 방식을 완전히 바꿨다. 대규모 노동이 필요한 농사를 위해 마을이 발전했고 땅은 곧 권력이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작물 종류는 다양해졌고, 농기구도 발전했지만 생산성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자연에서 태어난 작물은 가뭄·홍수 같은 악천후나 병충해 같은 외부 요인에 취약했다. 무작위로 여러 작물을 교배해 수확량을 늘리거나 빠르게 자라게 하는 육종 기술은 시간이 많이 필요했고, 성공률도 떨어졌다. 1976년 미국 워싱턴대 박사 후 연구원 메리 델 칠턴(Mary Dell Chilton·1939~)은 느림보 같은 농업의 1만년 진화를 완전히 바꿔놓은 혁명적 기술을 개발했다. 식물에 다른 유전자(DNA)를 직접 넣어 원하는 형질로 변형하는 유전자 변형 작물(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을 만든 것이다. 1996년 미국에서 처음 상업 재배가 허용된 GMO는 안전성, 생태계 교란 같은 숱한 비판에도 세계 종자 시장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더 좁은 땅과 부족한 물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는 벼, 살충제를 뿌리지 않아도 되는 밀처럼 꿈같은 일을 현실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아들 등에 업고 연구

1939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태어난 칠턴은 어린 시절 외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보험 영업을 하는 어머니가 제대로 돌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성복 가게를 운영하는 외할머니는 승마, 피아노를 가르쳤고 칠턴 역시 스스로 만화 ‘곰돌이 푸’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수녀원 학교에 다니던 칠턴은 7학년 때 공립학교로 전학 가면서 처음으로 과학 강의를 들었다. 평가 시험에서 칠턴이 지나치게 높은 점수를 받자 선생님들은 그가 커닝했다고 여겼다. 칠턴은 “그 순간 난 과학자의 길을 걸으리라고 깨달았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과 망원경을 만들어 별을 관측하는 취미도 생겼다.

1969년 아이를 업고 남편 스콧과 함께 식물 채집을 하고 있는 메리델 칠턴 박사. /신젠타

일리노이주립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칠턴은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학부 과정에는 천문학이 없었지만, 학부생도 청강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문학 담당 교수는 칠턴이 신입생이고 미적분학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칠턴은 “나에게 수업을 듣지 못하게 하려는 형편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했고, 곧바로 화학으로 전공을 바꿨다”고 했다. 대학원에서는 분자생물학에 빠져 당시 최첨단 분야였던 DNA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독성학자인 남편 스콧과 함께 갓 태어난 아들을 등에 업고 국립공원과 태평양 연안 지역을 다니며 식물을 채집하고 실험실로 가져와 분석하는 일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고 했다.

◇박테리아에서 찾아낸 GMO 기술

칠턴은 식물의 줄기나 뿌리에 기생하며 혹을 만들고 결국 식물을 말라 죽게 만드는 박테리아 ‘아그로박테리움’을 주로 연구했다. 이 아그로박테리움이 식물의 상처를 통해 들어간 뒤 자신의 DNA를 식물에 옮겨, 일종의 암을 유발하고 식물 형질까지 바꾼다는 것이 그의 가설이었다. 오래 노력 끝에 칠턴은 1976년 식물 염색체에서 아그로박테리움의 DNA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자신이 옳음을 입증했다. 칠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그로박테리움에 특정한 DNA를 심어 식물에 옮기면, 원하는 형질을 가진 식물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공한다면 수천 년 걸리는 진화나 수십~수백 년이 필요한 육종을 순식간에 뛰어넘을 수 있는 일이었다. 1983년 칠턴은 마이애미에서 열린 미국 생화학회 학술 대회에서 아그로박테리움을 활용한 최초의 GMO인 형질 전환 담배를 공개했다. 일리노이대 학보는 “그레고어 멘델이 연 육종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선언이 이뤄진 순간”이라고 했다.

그래픽=양진경

◇세계 농작물 수확량 22% 늘려

칠턴은 자신의 연구가 실험실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데 활용되길 원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종자 회사 ‘시바-가이기(신젠타의 전신)’ 초대 생명공학 연구센터장으로 자리를 옮겨 GMO 상용화에 나섰다. 병충해에 강한 DNA를 옥수수와 콩에 넣고, 가뭄에 강한 DNA를 벼와 면화에 넣는 식이다. GMO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카테고리의 기능성 종자도 만들어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특정 영양소가 훨씬 더 많은 작물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타카로틴이 풍부하도록 만든 황금 쌀(golden rice)은 비타민A 부족으로 시각이 손상되는 동남아시아 아이들에게 탄수화물과 비타민A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획기적 작물로 주목받았다. 국제농업생명공학응용서비스협회(ISAAA) 보고서에 따르면 칠턴의 GMO 기술은 세계 농작물 수확량을 22% 증가시켰고, 화학 살충제 사용은 37% 줄였다. GMO를 재배하는 농가 수익은 68% 늘었다. 지역의 소규모 종자 회사 신젠타는 칠턴의 지휘 아래 세계 최고 생명공학 회사로 성장했다. 2013년 칠턴은 세계 식량 안보에 이바지한 공로로 세계식량상을 받았다.

◇”아무도 굶주리지 않는 세상 꿈꿔”

포브스는 칠턴에 대해 “농업을 연구하면서 그를 모르는 것은, 농구 팬이면서 르브론 제임스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했다. 유전공학의 어머니, 현대 농업의 여왕 같은 호칭을 얻은 칠턴은 여러 차례 은퇴했다 돌아왔고, 80세가 되던 2019년에야 완전히 연구에서 손을 뗐다. 동료에게는 항상 “GMO는 아직 완벽하지 않으며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했다. 무엇이 그에게 지치지 않는 열정을 갖게 했을까. “식료품이 가득 찬 진열대를 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식물을 지속적으로 개량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수많은 사람이 여전히 굶주립니다. 전 아무도 배가 고픈 채로 잠자리에 들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위험 입증된 바 없다” vs “세대 지나봐야 문제 확인할 수 있어”

30년째 이어지는 GMO 논란… 다국적 기업 독점 문제 비판도

세계 식량·농업사에서 유전자 변형 작물(GMO)만큼 논쟁적인 주제는 없다. 자연의 진화에 인위적인 힘을 가한다는 막연한 거부감부터 환경에 미칠 악영향, 사람이 먹었을 때의 위험 등 지난 수십 년간 GMO를 둘러싼 수많은 과학적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과학계에서는 GMO의 위험성이 입증된 바 없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콩과 옥수수 같은 주요 작물의 대부분을 GMO가 차지하는 상황에서 아직 GMO가 사람의 건강에 직간접적인 위해가 된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메리델 칠턴 역시 “박테리아가 식물에 유전자(DNA)를 옮기는 것은 수억 년 전부터 자연적으로 존재했던 일이며, GMO는 이 원리를 활용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특히 모든 GMO의 판매가 허용되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철저한 사전 검증과 실험을 거쳐 보수적으로 GMO 종자 판매 허가를 내주고, 재배 지역도 제한하고 있다. 최소한 상용화된 GMO는 안전하게 관리된다는 논리이다. 반면 위험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원래 작물에 없던 외부 DNA를 삽입한 만큼 GMO를 계속 섭취할 경우 세대를 지나면서 새로운 유전적 문제가 생겨날 수 있다고 맞선다. 30년이 채 되지 않는 GMO의 역사로는 장기적인 위험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GMO를 신젠타, 몬샌토, 카길 같은 다국적 생명공학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점이 문제라는 시각도 많다. 현재 판매되는 GMO 종자는 대부분 환경 교란 방지 등의 목적으로 번식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진다. 농부가 매년 이 회사들에서 종자를 구입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급량을 조절하는 등의 방법으로 다국적 기업들이 가격을 올리면 농부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세계 식량 안보를 위해 개발된 GMO가 식량 안보의 가장 큰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