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석 새 단장을 마친 경남 양산시 북부동 ‘양산종합운동장’이 지방자치단체 예산을 아낀 사례로 최근 화제가 됐다. 2002년 준공된 양산종합운동장은 20년 이상 지나면서 2만여 관중석 색깔이 바래 흉물처럼 바뀐 상태였다. 운동장을 관리하는 양산시 시설관리공단이 확인한 관중석 교체 비용은 14억원. 의자를 그대로 두고 색칠만 새로 한다고 해도 2억원이 필요했다. ‘억’ 소리 나는 큰 금액에 고민이 깊어질 무렵, 시설관리공단의 한 직원이 낸 아이디어가 관중석을 토치(torch·가스 용접에 쓰는 화염 분출기)로 쬐는 것이었다. 빛바랜 의자들이 마법처럼 자기 색을 회복했고, 활짝 핀 꽃처럼 파랑·노랑·초록·빨강 관중석이 되살아났다. 색상 복원 작업에 든 비용은 총 200만원. 지자체 예산 절감 사례로 주목받은 배경이다.
◇자외선으로 색 잃은 플라스틱
토치가 요술 방망이처럼 관중석 색상을 되살린 비결은 무엇일까. 이에 앞서 관중석이 거의 허옇게 바랜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지가 확인한 양산종합운동장 관중석 재질은 폴리에틸렌(PE)이다. 플라스틱의 대표 재질로 꼽히는 폴리에틸렌은 탄소와 수소로 구성된 유기화합물 에틸렌이 결합해 이뤄진 고분자로, 일회용 비닐과 필름을 비롯해 장난감과 용기 등 다양한 플라스틱 제품에 사용된다. 특히 고밀도 폴리에틸렌이 운동장 관중석이나 페트병 뚜껑 등에 주로 쓰인다. 양산종합운동장 관중석이 색을 잃었던 주원인은 자외선이다. 실외 운동장 특성상 플라스틱 관중석이 오랜 시간 강한 햇빛에 노출돼 자외선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외선으로 플라스틱 의자의 색소 분자가 변형돼 본래의 색을 잃는 것이다. 여인형 동국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색소뿐 아니라 특정 플라스틱은 빛의 영향으로 물질의 분자 구조가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며 “이런 현상을 ‘광 퇴화(光 退化)’ 또는 ‘광 열화(劣化)’라고 한다”고 했다.
◇화염으로 빛바랜 층 걷어내
토치로 열을 가했을 때 의자들이 제 색상을 되찾은 것은, 자외선으로 변형돼 빛바랜 표면층이 열을 만나면서 소멸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 안쪽의 층이 드러나면서 색깔을 되찾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양산종합운동장 관중석에 대해 일각에서는 햇빛에 변형된 플라스틱 분자 구조가 화염 방사로 복원돼 색이 되살아났다고 추정했지만, 이는 열가소성 플라스틱의 분자 재배열에 관한 것이고 이번 관중석 색상 변화와는 거리가 있다.
배영찬 한양대 화학공학과 명예교수는 “열을 가해 색소 분자를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경우는 특정 화학 처리로 분자 재결합을 하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다”고 했다.
◇누렇게 변한 키보드엔 과산화수소
키보드나 마우스는 고부가합성수지(ABS)로 불리는 플라스틱을 주로 쓰는데, 빛의 영향을 받아 누렇게 변하는 이른바 ‘황변(黃變)’ 현상이 나타난다. 이 경우에는 물로 희석한 과산화수소에 첨가제를 넣어 걸쭉하게 만든 뒤 변색한 키보드에 바르고 직사광선이나 자외선 램프를 쬐면 하얗게 색이 돌아온다. 이를 ‘레트로브라이트(Retrobright)’라고 한다. 플라스틱 표면의 황변색 분자가 과산화수소와 반응해 산화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여인형 교수는 “산화 반응 정도에 따라 누런색이 사라지는 정도도 달라진다”고 했다. 일종의 표백 효과가 일어나는 셈이다. 이때 빛을 쬐는 이유는 자외선이 과산화수소와 황변색 분자의 반응을 활성화해 더 빠르게 누런 색을 없애기 위해서다. 다만 빛을 과도하게 쬐거나, 제대로 희석되지 않은 과산화수소를 사용하면 플라스틱 재질 자체가 손상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