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그룹 임성기 창업주의 장·차남이 사장직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그동안 경영권 갈등을 빚은 모친 송영숙 회장의 직을 유지해 가족 간 갈등 봉합에 나섰다. 4일 열린 그룹 지주사 한미사이언스 이사회에서 장남인 임종윤 이사는 제약·바이오를 담당하는 한미약품 대표이사에, 차남인 임종훈 이사는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에 선임하기로 했다. OCI그룹과의 통합 여부를 두고 극심한 갈등을 빚어온 창업주 아내이자 형제의 모친인 송영숙 한미사이언스 대표(한미그룹 회장)는 임종훈 이사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기로 했다. 어머니 편에 섰던 장녀 임주현 한미그룹 부회장도 직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번 한미그룹 경영진 개편은 지난달 28일 한미사이언스 주총에서 형제 측이 승리한 데 따른 것이다. 한미그룹은 올 초부터 상속세 재원 마련과 OCI와의 통합을 두고 송 회장과 장녀 임주현 부회장, 아들인 임종윤·종훈 형제로 나뉘어 경영권 다툼을 벌여 왔다.
이번 한미그룹 오너 가족 간 갈등 봉합은 경영권 안정과 상속세 문제 해결이라는 공통의 목표 때문으로 분석된다. 지분 경쟁에서 형제 측과 모녀 측 어느 한쪽이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향후 투자 유치 등을 위해선 단합이 필요하다. 또 2000억원이 넘게 남은 일가의 상속세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양측 간 협조도 필요한 상황이다.
◇한미 형제, 모친에게 손 내밀어
한미사이언스는 4일 이사회를 열고 임종훈 이사를 신규 대표이사로 선임하는 건을 통과시켰다. 지난달 28일 한미사이언스 정기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임종윤·종훈 형제가 송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 모녀를 이긴 지 1주일 만이다. 한미그룹 일가는 지난 1월부터 모녀 측이 추진해 온 OCI그룹과의 통합을 형제 측이 반대하면서 분쟁을 벌였다. 결국 주총을 통해 임종윤·종훈 형제를 포함해 이들이 추천한 5명이 이사로 선임되면서, 이사회(9명)의 과반을 차지했다. 형제 측이 경영권을 잡은 것이다.
형제 측은 모친인 송 회장을 해임하는 대신 공동 경영을 선택했다. 한미사이언스 이사회는 임종훈 대표를 선임하면서 ‘각자대표’ 체제가 아닌 ‘공동대표’ 체제를 선택했다. 각자대표 체제에서는 각각의 대표가 단독으로 의사 결정권을 가지는 데 반해, 공동대표 체제는 모든 대표가 동의해야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형제 측의 일방적 경영이 불가능한 것이다. 업계 안팎에서는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추락한 한미그룹의 브랜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일가 갈등을 봉합했다는 메시지를 대외적으로 표현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주총 직후 형제는 “(어머니, 여동생과) 같이 가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사회에서는 또 장남인 임종윤 이사를 한미약품 대표로 선임하기로 결정했다. 조만간 계열사인 한미약품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임종윤·종훈 형제를 포함한 측근들을 새 이사진으로 진입시키고, 임종윤 이사를 대표로 선임하겠다는 계획이다. 경영권 분쟁 때 형제 측을 지지했던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을 한미약품의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안건도 상정된다. 신 회장은 한미사이언스 지분 12.15%, 한미약품 지분 7.71%를 보유한 개인 최대 주주다. 이사회는 또 이날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자기주식 156만여 주를 소각하기로 의결했다고 밝혔다.
◇”상속세 문제 해결 위한 포석” 시각도
형제 측과 모녀 측 간의 동행은 경영 안정뿐 아니라 상속세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미그룹 오너 일가는 2020년 8월 별세한 임성기 창업주에게 1조원가량의 주식을 상속받았다. 일가에게 총 5400억원의 상속세가 부과됐고, 지금껏 3년에 걸쳐 절반가량을 납부했다. 모녀 측이 OCI와의 통합을 추진한 이유 중 하나도 상속세 문제 해결이었지만, 결국 통합이 무산됐다. 이런 가운데 오는 4월 말에 또 상속세 일부를 납부해야 하는 만큼 일단은 양측이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미납 상속세가 발생할 경우 공동 상속인에게 연대 납부 책임이 생기기 때문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이전부터 임종윤 이사 측은 가족의 상속세 문제를 다 같이 해결하려고 했던 것으로 안다”며 “갈등은 잠시 묻어두고 가족 간에 서로 합의하면서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려고 손을 내민 것”이라고 했다.
상속세 문제를 풀기 위해 형제 측이 글로벌 사모 펀드(PEF) 운용사와 손잡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경영권 보장을 전제로 형제 측이 한미사이언스 지분을 사모 펀드에 일부 매각한다는 것이다. 현재 형제 측은 “지분 매각은 절대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형제 측 관계자는 “(지분 매각을 위한) 사모 펀드와의 관계설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