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의약품 부족 현상이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당뇨병과 비만 치료제로 각광받으며 인기를 끌고 있는 ‘세마글루타이드’ 성분뿐 아니라 환자 생명에 직결되는 중증 알레르기 치료제 ‘에피네프린’, 항생제인 ‘아목시실린’ 등이 모두 부족한 상황이다.
의약품 부족은 미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한국도 미국만큼 심각하지 않지만, 일부 골다공증 치료약과 중환자 면역결핍 치료제 등 90종이 넘는 의약품이 공급 부족·중단 사례를 보이고 있다.
의약품 부족은 글로벌 원료 의약품의 약 60%를 차지하는 중국·인도로부터 공급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이곳에서 조달한 원료 의약품을 가지고 완제품을 만든다. 하지만 코로나 기간 생산 차질이 발생한 현지 공장들이 코로나 엔데믹(풍토병화) 1년이 지나도록 정상화되지 못하고, 재고마저 바닥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대체 의약품 등으로 공급 부족 상황을 해결하고 있지만, 장기화될 경우 가격 인상과 환자들의 불편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국, 인도 위주 공급망 위기
12일(현지 시각)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병원약사회 자료를 인용해 지난 1분기 미국에서 총 323종의 약물이 부족 현상을 겪었다고 보도했다. 이는 2001년 자료를 집계한 이후 최고치다. WSJ에 따르면 미국 약국 곳곳에서 환자들이 약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 약을 찾기 위해 여러 약국을 방문해야 하거나 주요 치료를 받기 위해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WSJ는 “많은 복제약(제네릭) 제조 업체는 인도와 같이 인건비가 더 저렴한 국가로 업무를 넘기거나 해외 생산을 맡겼다”며 “공장이 생산을 중단하면 부족 현상이 계속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원인을 분석했다.
의약품 부족은 우리가 먹는 약의 재료가 되는 ‘원료 의약품’의 공급망 위기 때문이다. 원료 의약품은 완제 의약품을 만드는 데 쓰이는 원료다. 원료 의약품은 화학물질들을 조합만 하면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제조가 쉽다. 따라서 현재 세계 원료 의약품의 60%를 값싼 인건비를 앞세운 중국과 인도에서 생산되고 있다.
현재 미국 100대 제네릭 중 83% 이상이 미국 내 공급처가 없는 원료 의약품을 사용하고 있다. 자주 처방되는 항바이러스제와 항생제는 90%가 해외 원료 의약품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시기 인도나 중국 공장이 생산을 중단하는 등 공급망 문제가 불거졌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등 잇단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이 올랐다. 제약 업계 관계자는 “미국 업체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신약 개발에 집중하고, 제네릭이나 원료 의약품 사업 같은 경우는 해외 제약 기업에 맡겨 왔다”며 “코로나 이후 공급망 위기가 계속돼 원료 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국내에서도 부족 사태 조짐
국내에서도 이 같은 의약품 부족 사태가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식약처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4일까지 90종이 넘는 의약품이 공급 부족·중단 사례를 보이고 있다. 골다공증 통증 주사 엘카토닌, 중환자 면역결핍 치료에 사용되는 면역글로불린, 안과 수술 보조제 비스코트 점안액 등이 원료 의약품을 수급하지 못해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다.
한 약국 관계자는 “소아 청소년들이 복용하는 약들은 도매 업체에서 목록을 정해서 구입하려고 해도 약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며 “약사의 인맥 등을 통해 비슷한 약을 구하기는 하지만 환자들 입장에서는 약을 구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식약처에 따르면 국내 원료 의약품 자급도는 2008년 21.7%를 기록한 뒤 20% 안팎을 오가다가 2022년에는 11.9%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전체 원료 의약품 수입액 3조1400억원 중 중국이 1조2000억원, 인도가 4000억원, 일본이 3000억원을 기록했다. 중국, 인도, 일본의 원료 의약품 수입액은 전체 수입액의 60%에 달하는 상황인 것이다.
낮아진 원료 의약품 자급도가 미국과 같은 의약품 부족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보건복지부는 원료 의약품 자급화를 위해 국가 필수 의약품 지정 성분의 제네릭이 국산 원료를 사용해 신규 등재할 경우 다른 제네릭보다 약가를 우대한다는 방침을 내놨다. 하지만 원가 상승, 재허가 비용 등의 영향으로 실효성이 적다는 지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산 원료를 쓰면 남는 것이 적기 때문에 제약 업체들은 저렴한 중국이나 인도 원료를 구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약가 우대 외에도 허가 절차 간소화 등을 통해 원료 의약품 국산화에 힘을 실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