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처방하는 치료용 애플리케이션(앱)인 디지털 치료제가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신규 허가를 통해 적용 대상이 불면증에서 시야 장애, 호흡 장애 등 신체 질환까지 확대됐고, 올해 첫 처방도 이뤄졌다. 합성 의약품, 바이오의약품에 이은 3세대 신약으로 불리며 미래 먹거리로 꼽힌다. 하지만 업계에선 “디지털 치료제 대중화를 위한 거름은 뿌려졌지만, 처방 확대까지는 갈 길이 멀다”며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불면증 넘어 뇌·호흡 질환 치료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19일 뉴냅스의 ‘비비드 브레인’, 쉐어앤서비스의 ‘이지 브리드’를 국내 디지털 치료제 3·4호로 허가했다고 밝혔다. 임상 시험을 통해 안전성과 유효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비비드 브레인은 뇌 질환으로 시야 장애가 생긴 환자에게 12주간 시지각 훈련을 제공해 좁아진 시야를 개선한다. 가상현실(VR) 기기와 앱을 활용해 화면에 뜨는 줄무늬의 방향을 비교하는 등 훈련을 하게 된다.
이지 브리드는 천식, 폐암 등 폐 질환 환자에게 8주간 호흡 재활 훈련을 돕는다. 보행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맞춤형 유산소운동을 처방해주고. 그걸 마치고 나면 숨찬 정도 등을 환자가 앱에 기록하는 방식이다. 병원에 가서 해야 하는 재활 치료를 앱으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3·4호 허가를 통해 국내 디지털 치료제의 적응증(대상 질환)이 대폭 확대됐다. 국내에서는 지난해부터 디지털 치료제가 허가됐다. 작년 2월에는 에임메드의 ‘솜즈’가, 4월에는 웰트의 ‘웰트아이’가 식약처 허가를 받았다. 두 치료제 모두 환자가 작성하는 ‘수면 일기’ 데이터를 기반으로 맞춤형 취침 시간 등을 제공하는 앱이다.
디지털 치료제는 2017년 미국 ‘페어 세러퓨틱스’가 개발한 알코올·마약 등 중독을 치료하는 앱 ‘리셋’이 미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으면서 제도권에 진입했다. 기존 헬스케어 앱들과 다르게 의사가 특정 질환에 대해 약과 함께, 혹은 약 대신 처방해주는 것이 차이점이다. 약을 먹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개인별 맞춤 치료를 받고 싶은 환자가 주 대상으로 꼽힌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마케츠 앤드 마케츠에 따르면 2023년 디지털 치료제 시장 규모는 61억달러(약 8조원)으로, 2028년까지 219억달러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헬스케어 업계 관계자는 “이미 미국·독일에서는 우울증, 당뇨, 비만 등에 대해 디지털 치료제 처방을 하고 있다”며 “이번 허가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다양한 질병에 적용되는 치료제들이 진입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고 했다.
◇처방 확대는 요원
하지만 디지털 치료제가 처방되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걸린다는 지적이 많다. 디지털 치료제 솜즈는 작년 2월 식약처 허가를 받은 뒤 올해 1월 서울대병원에서 첫 처방을 하기까지 약 11개월이 걸렸다. 식약처 허가를 받더라도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심의를 재차 거쳐야 처방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 4월 식약처 허가를 받은 웰트아이도 최근에야 연구원 심의를 통과해, 올해 안으로 처방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 디지털 치료제 업체 대표는 “국민 건강과 연결되는 이슈인 만큼 신중해야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처방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 사실”이라며 “안전성이 검증된 경우,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규제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의료진과 환자를 대상으로 한 인식 개선도 과제다. 솜즈는 1월 이후 지금껏 20여 건 처방된 것으로 전해졌다. 솜즈를 처방하는 이유진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디지털 치료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환자뿐 아니라 의료진도 디지털 치료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처방까지 이어져야 한다”며 “투약에 비해 안전성이 높은 만큼 장기적으로 디지털 치료제에 친화적인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디지털 치료제
의학적 장애나 질병을 예방·관리·치료하기 위해 환자에게 처방하는 소프트웨어(앱). 임상 시험을 거쳐 식약처 허가를 받아야 쓸 수 있다. 의사 처방이 없으면 쓸 수 없다는 점에서 일반적 건강관리 앱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