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RN의 입자가속기 아틀라스의 모습. /사진=CERN

중국 과학계에서 대형 입자가속기 건설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달 저명한 이론물리학자로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 이사회 의장인 엘리에제르 라비노비치 박사가 “중국이 세계 최대 규모의 입자가속기를 건설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히면서다. CERN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입자가속기(LHC)를 건설해 운영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지난 6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에서 50억달러(약 6조8000억원)가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두고 다시금 논쟁이 시작됐다”고 전했다.

입자가속기가 어떤 장비이길래 6조원 이상을 들여서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일까. 최근 인기를 끈 동영상 서비스(OTT) 넷플릭스의 공상 과학(SF) 드라마 ‘삼체’는 인류가 400광년 떨어진 행성에서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진격해오는 외계인에 맞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외계인들은 지구 도착 전 인류 문명의 발달을 막기 위해 과학기술 발전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계획을 세운다. 그중 가장 먼저 실행된 것이 지구의 모든 입자가속기를 교란해 엉뚱한 실험 결과를 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입자가속기가 해석할 수 없는 결과를 내놓자 과학자들은 절망한다. SF에 불과하지만 현대 과학 연구에서 입자가속기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세계에는 2만대 이상의 입자가속기가 있고, 이를 이용한 연구 결과 중 30건 이상이 노벨상을 받았거나 후보에 올랐다.

그래픽=이진영

◇우주 비밀 밝힐 입자가속기

입자가속기는 전하를 띤 입자를 전기장, 초전도 장치 등을 이용해 가속시킨 뒤 표적에 충돌시켜 물질 내부를 연구하는 장비다. 직선으로 늘어선 선형으로 만들 수도 있고, 끝을 이어 원형으로 만들 수도 있다. 방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것부터 수십㎞에 달할 긴 것도 있다. 가속되는 입자의 종류에 따라 중이온·양성자·전자 가속기 등으로 분류된다.

입자가속기의 사용처는 다양하다. 입자의 내부 구조를 들여다보는 등 다양한 물리학 연구에 사용될 수도 있고, 직접적으로 암세포를 타격해 암 치료에 사용되기도 한다. 학문적으로 보면, 주로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새로운 입자를 찾거나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쓰인다.

입자가속기를 이용해 나온 가장 대표적인 현대 물리학의 성과가 바로 ‘신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 입자다. 우주 탄생의 원리를 설명하는 입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기본 입자들로 구성되는데, 힉스 입자는 이런 기본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힉스 입자가 존재한다는 가설이 나온 지 48년 만인 2012년 연구자들이 CERN의 세계 최대 규모의 대형 강입자가속기(LHC)를 이용해 이 입자를 발견해냈다. LHC는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 지대 지하 100m 깊이에 설치되어 있고, 길이가 27㎞에 달한다.

CERN은 차세대 입자가속기인 원형 입자가속기(FCC)를 개발 중이다. LHC의 3배 규모로 10배 더 강력한 힘으로 입자를 충돌시킨다. 입자를 더 큰 에너지로 충돌시킴으로써 137억년 전 우주 대폭발(Big Bang) 순간을 실제와 더 가깝게 재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재 FCC는 2027년 완료를 목표로 타당성 검토를 받고 있다. 중국이 FCC에 필적하는 입자가속기를 구축해야 한다고 CERN 이사회 의장이 주장한 이유는 여러 연구자들이 첨단 실험을 위해 대형 입자가속기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장비 라온, 내달 첫 실험

국내에도 여러 입자가속기가 구축돼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특히 1조5000억원이 투입돼 ‘단군 이래 최대 기초과학 프로젝트’로 불리는 중이온가속기 ‘라온’이 오는 6월 본격 실험 가동을 앞두고 있다. 라온은 무거운 원소(중이온)를 가속해 표적에 충돌시켜 새로운 희귀 동위원소들을 생성하고, 이 과정에서 우주와 원소의 기원 및 별의 진화 과정을 밝힐 실험적 데이터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와 함께 포항 방사광가속기, 반도체 품질 검증에 응용되는 경주 양성자가속기 등도 운영되고 있다. 기존 원형가속기보다 100배 이상 밝은 빛을 내도록 설계된 오창 다목적 방사광가속기는 2028년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