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대 유전체 분석업체 BGI(베이징게놈연구소)는 약 10년 전부터 유럽과 한국을 비롯해 100여 국가 의료기관에서 1000만 건에 달하는 태아 DNA 선별검사를 수주했다. 임신부 혈액에서 채취한 태아의 DNA를 분석해 다운증후군 여부 등을 판별하는 것이다. 출산 전 필수 검사로 통하는데, BGI가 저가로 내놓아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BGI는 이렇게 확보한 유전 정보 가운데 상당수를 중국 인민해방군과 공유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심지어 고산병(高山病)에 걸리지 않는 유전 정보를 확보해 전투 능력을 강화한 ‘수퍼 군대’를 양성하는 데 생체 정보를 활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2~3년 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미국은 생체 정보 유출을 국가 안보 위협 요인으로 보고, 중국과 ‘바이오 패권 전쟁’에 나서고 있다. 반도체·인공지능 등 첨단 산업에 이어, 바이오 산업에서도 중국을 본격적으로 견제하는 것이다.
올해 3월 미국 상원에 이어 지난 15일 미국 하원 상임위원회는 바이오 관련 대중 제재를 담은 ‘바이오 보안법(Biosecure Act)’을 통과시켰다. 미국 정부와 산하 기관, 정부 예산을 지원받는 기업이 중국의 대표적 바이오 기업들과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BGI와 MGI, 컴플리트 지노믹스, 우시앱텍, 우시바이오로직스를 ‘우려 기업’으로 명시하고 규제 대상으로 삼았다. 연내 의회 전체회의와 대통령 서명을 거쳐 공포가 확실시된다.
◇국가 안보 좌우할 ‘바이오 데이터’
미국 상·하원이 초당파적으로 바이오 보안법을 발의한 것은 자국민의 유전 정보 등 ‘바이오 데이터’의 안보적 중요성이 급격히 커진 데 따른 것이다. 미국·영국·일본·핀란드 등 주요국은 자국민이 취약한 질병을 치료하는 신약 개발 등을 위해 대규모 바이오 데이터를 구축하고 있다. 이를 악용하면 특정 국가 국민이 걸리기 쉬운 질병을 파악할 수 있고, 심지어 악성 바이러스를 비롯해 생체 무기 생산에 쓸 수 있다. 미 상원의회는 지난달 펴낸 백서에서 “바이오 데이터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면 자연 발생 병원체보다 훨씬 해로운 병원체를 만들 수 있고, 특정 집단의 안전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쓸 수 있다”며 “중국 공산당이 지속적으로 대규모 바이오 데이터를 수집, 분석, 저장 중이어서 우려된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1월에는 베이징화공대, 베이징의 인민해방군(PLA) 종합병원 등 공동 연구진이 실험실에서 ‘치사율 100%’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를 만들었다는 논문을 발표해 과학계를 놀라게 했다.
대규모 바이오 데이터를 보유한 국가가 이를 이용해 특정 국가 국민에게 가장 효능 있는 신약을 만들면, 의약품 의존이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실제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때 백신을 생산하지 못한 국가들이 자국민 건강을 외국에 의존하게 되면서 ‘백신 주권’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유전체 분석~신약 생산까지 완비한 中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바이오 패권’ 전쟁을 선언한 것은 중국의 경쟁력이 미국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유전자 데이터가 많은 중국국립유전자은행을 운영중이다. BGI는 세계 30여 국가에서 바이러스 정보를 수집하는 ‘파이어 아이(Fire-Eye)’라는 실험실을 운영하고 있다. 유전체 분석 기업인 컴플리트 지노믹스는 원래 미국 회사였는데 BGI가 2013년 인수했다. 이를 통해 유전체 분석 첨단 기술과 민감한 데이터가 중국에 유출된 것으로 미국 정부는 의심한다. 바이오 업계에서는 BGI 자회사였던 MGI가 유전체 분석 장비를 생산하는 기술을 갖추고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한 것도 컴플리트 지노믹스 인수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우시앱텍은 글로벌 대형 제약사의 CRO(위탁임상시험)를 도맡는 회사로, 의약품 CDMO(위탁개발생산) 세계 4위(매출 기준)인 우시바이오로직스를 자회사로 두고 있다. 이처럼 유전체 분석부터 의약품 대규모 위탁생산까지 완비한 중국 기업들이 향후 신약 개발을 비롯해 미래 바이오 산업을 주도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이번 법안의 속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바이오 보안법에 대해 BGI는 법안이 허위 사실에 기반해 발의됐다고 비난하는 성명서를 냈다. 중국 정부, 인민해방군과 관련성이 없는 민간 회사이고 바이오 데이터를 유출한 적 없다는 반박이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나날이 발전하는 AI 기술과 접목되는 바이오 빅데이터는 선하게 쓰이면 질병을 정복하는 원천이 되지만,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바이오 보안법(Biosecure Act)
미국 의회가 중국 바이오 기업들을 견제하기 위해 발의한 법안으로 상하원 상임위를 각각 통과해 전체 회의와 대통령 서명을 거쳐 연내 공포될 전망이다. 미국 정부를 비롯해 관련 기관, 정부 지원금을 받는 기업들은 ‘우려 기업’으로 명시된 중국 바이오 기업의 장비와 서비스 등을 구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이 확정되면 2031년 말까지 이 기업들과 거래를 끊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