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게 해줍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멈추지 않지만 반도체는 물리적 한계인 ‘1.5나노’ 근처까지 왔습니다. 이제는 천재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연구개발(R&D) 협력이 필수입니다.”

정은승 삼성전자 DS부문 상근고문은 1985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에 입사해 40년 동안 반도체 분야에서 일한 전문가다.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장과 파운드리사업부 사업부장, DS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를 거치며 반도체 사업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정은승 삼성전자 DS부문 상근고문이 21일 오후 성남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토론회에 참석해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한국과학기술한림원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전 세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경쟁력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 고문은 2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한국과학기술한림원회관에서 열린 한림원탁토론회에서 ‘협력’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정 고문은 이날 ‘K-반도체 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 협력 전략’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았다.

정 고문은 “2013년 반도체연구소장을 할 때 이제부터는 우리 혼자서 못 한다고 선언하고, 설비업체와 소재업체들에게 삼성전자의 반도체 로드맵 10년치를 제공하기 시작했다”며 “과거 삼성전자의 테크니컬리뷰미팅(TRM)은 설비업체를 불러 다른 업체와 경쟁시키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삼성전자의 로드맵을 공유하고 함께 모듈 기술의 로드맵을 그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정 고문은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며 “지금은 나 혼자 이익을 얻겠다고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혁신적인 기술 개발을 위해서는 협력의 창구를 글로벌로 넓혀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정 고문은 “2000년대 중반 모바일 시대가 올 때 삼성전자는 반도체 제조 역량은 높았지만, 회로 기술이 약했다”며 “회로 기술을 배우기 위해 IBM이 주도하는 캠프에 참여해 약점을 메우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주도한 MRAM(자기저항메모리)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가 혼자서 개발한 게 아니라 전 세계 연구자를 한데 모아 학회를 열고, 수요자인 퀄컴, NXP 같은 기업들과 함께 개발한 결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정 고문은 “한국의 설비·소재 산업이 망하게 만들면 안 된다”며 “반도체 산업을 위해서는 설비·소재 업체들과 협력해서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이은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원천기술과장은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분야 국제협력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소개했다. 이 과장은 “올해부터 미국과학재단(NSF),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와 함께 공동 펀딩 방식으로 반도체 첨단기술 연구에 착수하고, 매년 한·미, 한·EU 반도체 연구자 포럼을 개최해 글로벌 반도체 네트워크를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최용수 SK엔펄스 개발실장(CTO)은 “소자업체, 설비업체, 소재업체 간의 협력 생태계 구축은 우리 반도체 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필수 전략”이라며 “공동 R&D 센터를 설립해 원팀처럼 혁신적인 기술 개발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