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在美) 한인 과학자가 개발한 획기적인 뇌 질환 진단 기기가 본격 출시됐다. 이 의료기기는 뇌전증(간질)과 알츠하이머 치매, 파킨슨병 같은 뇌 질환을 쉽고 빠르게 진단한다. 뇌 질환 치료제의 효능도 확인할 수 있어 신약 개발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과 유럽, 심지어 중동 국가까지 출시될 예정이다.
미국 디지털 의료기기 업체 엘비스(LVIS)는 28일 오후 1시 대구 경북대에서 ‘뉴로매치(NeuroMatch) 쇼케이스’를 개최했다. 엘비스는 이진형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전자공학과 교수가 2013년 미국 팔로알토에 창업한 의료기기 기업이다. 이 교수는 전기공학과 뇌 과학을 합친 연구로 미국 국립보건원(NIH) 파이어니어상을 받은 세계적인 과학자다.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스탠퍼드대에서 전기공학 석·박사학위를 받은 엔지니어지만, 외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뇌 연구로 진로를 바꿨다.
뉴로매치는 이 교수가 개발한 인공지능(AI) 기반 뇌 질환 진단·치료 플랫폼이다. 이 교수는 엔지니어답게 전자제품을 수리할 때처럼 전체 회로를 보지 않고는 뇌질환을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교수는 먼저 빛을 받으면 작동하도록 신경세포를 변형시켰다. 이후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으로 뇌 전체를 촬영해 어느 곳에 혈액이 모이는지 알아냈다. 이런 방식에서 한 신경세포가 작동하면 뇌 전체에서 어떤 회로가 만들어지는지 확인한 것이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AI를 통해 뇌 모양으로 표현해 일종의 ‘두뇌 디지털 트윈’을 만들었다. 디지털 트윈은 실제 세계를 3D로 가상 세계에 구현한 것이다.
이 교수는 뇌파를 측정해 뇌전증 증상을 분석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우선 공개했다. 엘비스는 뇌전증뿐 아니라 알츠하이머 치매, 수면 장애, 파킨슨병, 자폐 같은 뇌 질환 5가지에 대한 진단·치료법을 제시할 계획이다. 치매 진단 솔루션은 내년 출시를 앞두고 있다.
엘비스는 이날 뉴로매치를 직접 시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뇌전증을 진단하기 위해선 먼저 뇌파를 측정해야 한다. 전극이 달린 두건을 쓰면 뇌파가 측정된다. 전극은 식염수로 적셔진 천과 맞닿아 있는데, 식염수가 전도체 역할을 해 뇌파 신호를 전극에 전달한다. 전극을 바늘 형태로 만들고 머리에 직접 찌르는 기존 방식보다 감염이나 통증 위험이 낮다.
엘비스는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와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뉴로매치의 의료기기 승인을 받았다. 뉴로매치는 서울대병원과 삼성서울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아산병원을 포함해 국내 대형병원 10곳에 공급된다. 이 교수는 국내에 먼저 출시한 이후 오는 연말쯤 미국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교수는 “한국, 미국 외에 사우디아라비아 의료진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 출시를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뉴로매치는 뇌 질환 진단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으로 기대된다. 뇌전증 환자는 보통 수술 전 24시간 정도 뇌파를 조사한다. 의사는 이때 얻은 방대한 뇌파 데이터를 하나하나 분석한다. 반면 의사가 뉴로매치를 사용하면 뇌파 데이터 분석을 몇 분 안에 끝낼 수 있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뇌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해준다는 점도 장점이다.
뇌 질환자가 늘어가는 데 비해 의사가 부족한 상황을 타개할 수도 있다. 중앙치매센터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뇌전증 환자는 15만747명으로, 매년 2093명씩 늘어나고 있다. 반면 한국 신경외과 의사 수는 10만 명당 4.75명에 그친다. 뇌 분석 시간을 몇 분 수준으로 줄이는 것만으로도 뇌 질환자 치료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또 치료 효과를 입증하지 못했던 뇌 질환 치료제 신약 개발도 뉴로매치의 등장으로 문제가 해결될 전망이다.
손영민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전증은 뇌파라는 일관된 바이오 마커(생체 지표)가 있지만, 뇌파를 정형화된 정보로 만들어주는 객관적인 기기가 없다”며 “AI를 기반으로 시각적으로 뇌를 이해하는 데 뉴로매치가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엘비스는 대구에 ‘뉴로매치센터’를 세우고 의료진이 뉴로매치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 교수는 창업 11년 만에 뉴로매치가 출시되면서 뇌 질환 진단과 치료제 개발의 패러다임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미국만 해도 신경과 의사가 부족해 뇌전증을 진단하려면 1년 이상이 걸린다”며 “디지털 트윈으로 뇌 상태를 확인하면 진단과 치료가 혁신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