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대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앞에서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관계자들이 2024년도 국가 주요 연구·개발(R&D) 예산안 삭감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27일 정부는 내년도 주요 R&D 예산안을 24조8000억원으로 책정했다고 밝혔다. 삭감 이전인 2023년도와 비교하면 1000억원 늘어난 규모다. /연합뉴스

정부가 내년 국가 주요 연구개발(R&D) 예산을 올해보다 2조9000억원(13.2%) 늘어난 24조8000억원으로 책정했다. 2023년과 비교하면 1000억원 증가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7일 열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의 ‘2025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올해 큰 폭으로 삭감됐던 정부 R&D 예산은 1년 만에 복구됐지만, 연구 현장에 남긴 혼란은 적지 않다. 올해 예산이 줄면서 대학들은 인공지능(AI) 등 차세대 산업 분야 연구원 수를 줄였다. ‘생애 첫 연구’ 지원과 ‘기본 연구’ 지원이 사라지면서 특히 젊은 연구자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과학계에선 “예산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과학기술 연구를 계속해도 될까’ 하는 불안감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는 반응이 나온다.

일러스트=박상훈

‘R&D 예산 파동’은 1년 전 대통령이 “갈라 먹기식 R&D 재검토”를 주문하면서 시작됐다. 단기간에 10% 넘는 예산을 삭감하고 재편성하다 보니, 과학기술계의 여론 수렴이나 정교한 정책 조율이 이뤄지지 않았다. 과학기술계의 극렬한 반발에 직면한 후 정책 기조를 바꿨다.

과학기술계도 ‘R&D 제도의 개혁’이라는 취지에는 공감한다. 실제 이번에 ‘부처 간 중복 지원 축소’와 형식적인 예비타당성 조사 폐지 등의 제도 개선은 있었다. 하지만 정책 대상을 ‘개혁의 대상’으로 몰아붙이면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배영찬 한양대 화학공학과 명예교수는 “시간을 두고 정책을 더 정밀하게 만들고 과학기술계와 대화를 했다면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 많은 성과를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성규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6월 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2024년도 국가 주요 연구개발(R&D) 사업 예산·배분안’에 제동이 걸렸다. 이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나눠 먹기식, 갈라 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면서다. 특정 세력이 계속 연구비를 나눠 먹는 사실상의 ‘연구비 카르텔’이 형성돼 국가 R&D 예산이 일부 인사에 의해 좌우돼 왔다는 지적이었다.

◇두 달 만에 예산안 전면 조정

이날 대통령이 정부 R&D 예산에 대해 전면적인 방향 수정을 지시하면서 예산안을 마련해온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비상이 걸렸다. 이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에서 예산 배분·조정안을 확정하기로 했는데, 원점부터 다시 검토하기로 하면서 심의회의를 연기했다. 이후 예산 관련 절차는 모두 멈춰 섰다.

R&D 예산 배분·조정안을 확정해 기획재정부에 알려야 하는 법정 기한(6월 30일)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예산 배분·조정안을 마련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것이다. 당장 과학기술 분야 출연연이 갑작스러운 유탄을 맞았다. 과기정통부는 각 출연연에 기존에 제출한 예산안에서 20% 안팎을 줄인 규모로 다시 내라고 요구했다. 통상 3~4개월 준비해온 내년도 예산안을 하루 이틀 만에 다시 조정해 제출하라는 지시에 각 출연연은 큰 혼란에 빠졌다. 출연연의 한 연구원은 “초유의 상황에 ‘멘붕(멘털 붕괴)’ 상태였다”며 “정부 출연금 비중이 큰 기관은 더 심한 타격을 받았다”고 했다.

재검토 2개월 만인 지난해 8월 과기정통부는 출연연의 상당수 R&D 예산을 일괄 삭감하는 내용을 담은 예산안을 내놓았다. 과제별 중요성이나 시급성을 평가할 시간이 없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이를 담은 2024년도 주요 R&D 예산안을 전년 대비 13.9% 줄인 21조5000억원으로 의결했다. 당시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낡은 R&D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내고 선도형 R&D로 나아가는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성규

◇사태 키운 과기정통부

과학기술계와 소통하며 구체적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 과기정통부도 우왕좌왕했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1년여 동안 R&D 예산의 비효율성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부 안팎에서 나왔지만, 구체적 개혁 방안을 준비하지 않았다. 과학계 관계자는 “지난 정부에서 10조원이나 늘어난 R&D 예산을 새 정부가 효율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는데, 주무 부처가 거의 1년 동안 안이하게 대처하다 뒤늦게 떠밀리듯 대처한 면이 있다”고 했다.

과기정통부의 갑작스러운 대규모 예산 삭감 발표에 연구 현장은 들끓었다. 출연연 예산과 대학의 기초 연구 예산이 줄어들면 과학기술이 퇴보할 것이라고 과학계가 반발했지만, 주무부처인 과기정통부는 중재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거의 한 달 후에야 이종호 장관이 신진 연구자들과 학생 연구원들을 공식적으로 만났다고 밝혀 뒷북 대처라는 뒷말이 나왔다.

지난해 과기정통부는 ‘연구비 카르텔’ 문제는 투명성을 확보하고 엄격하게 성과를 평가하는 등 시스템을 개선해 해결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교육계에서 드러난 사교육 업체 유착과 같은 카르텔의 실체는 밝혀내지 못했다.

◇'꼬리 자르기’에 그친 책임 규명

예산 삭감 논란이 커지는 와중에도 정부는 예산 삭감을 추진하는 이유와 감액 규모에 대한 근거 등을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고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출연연·대학·기업 등 과학기술계는 서로를 향해 카르텔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복마전까지 벌어졌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준비했어야 할 예산안 조정을 단기간에 무리하게 밀어붙인 부작용으로 논란은 커졌고, 결국 여야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정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대통령실은 뒤늦게 올해 1월 신설한 과학기술수석에 박상욱 서울대 교수를 임명하고 진화에 나섰다. 지난 2월에는 과기부 1·2차관, R&D를 담당하는 혁신본부장을 교체했다. 정부가 지난 6월 예비타당성 심사제도를 폐지한다고 밝히고 이번에 예산안을 다시 늘리는 등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지난 1년간의 사회적 비용을 상쇄하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과학기술계 관계자는 “R&D 예산 정책을 개혁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지만, 너무 조급하게 밀어붙이다 오히려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