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조선팰리스에서 만난 머레이 아이킨(Murray Aitken) 아이큐비아 휴먼 데이터 사이언스 연구소(IQVIA Institute for Human Data Science) 소장. /허지윤 기자

머레이 아이킨(Murray Aitken) 휴먼데이터사이언스연구소(IQVIA Institute for Human Data Science) 소장은 “25년 만에 방문한 서울에서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의 급성장을 피부로 느낀다”고 말했다. 이 연구소는 글로벌 헬스케어 컨설팅기업인 아이큐비아(IQVIA)의 싱크탱크이다.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조선팰리스에서 만난 아이킨 소장은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다시 고향에 온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IQVIA 입사 전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매킨지(McKinsey)에 있었는데, 1991년부터 1997년 초까지 매킨지 서울지사에서 일했다.

아이킨 연구소장에게 현재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은 ‘격세지감’을 안겼다. 그는 “1990년대 한국에서는 바이오 기업의 활동이 거의 전무했다”며 “당시 한국서 주목받은 산업은 소비, 가전, 반도체, 조선 분야였고, 그렇다 보니 한국은 생명과학 분야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적었다”고 말했다. 아이킨 연구소장은 “25년 만에 한국 과학자들과 기업인들을 만나 현재 진행 중인 연구개발(R&D)과 사업 계획, 치료제 개발 목표에 대해 들으면서 한국의 생명과학이 정말 큰 진전을 이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했다.

실제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 위기를 지나 2000년대에 접어들자, 삼성·LG·SK·롯데 등 대기업들이 ‘바이오’를 미래 먹거리로 겨냥했다.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세계 바이오시밀러(바이오 의약품 복제약) 시장을 열었고, 한미약품·유한양행·종근당·대웅제약·JW중외제약·GC셀·리가켐바이오·알테오젠·오름테라퓨틱 등이 글로벌 제약회사에 신약 기술을 수출했다.

아이킨 소장은 “제약·바이오 산업은 매우 역동적인 분야라, 글로벌 시장에서 영원한 1등이란 없다”며 “파이프라인(신약후보군)의 혁신과 시기에 따라 시장 지위는 달라진다. 한국에도 큰 성장의 기회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신생 바이오기업이 전 세계 임상시험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크게 부상하면서 글로벌 제약사들과의 협력도 활발하다./게티이미지뱅크

아이킨 연구소장의 말처럼 글로벌 제약사의 지위가 급변하는 사례들이 잇따라 나왔다. 당뇨병 연구에 몰두해 온 덴마크의 노보 노디스크가 비만 치료 신약 개발로 단숨에 유럽 시가총액 1위의 글로벌 기업이 된 게 단적인 예다. 반면 블록버스터급 면역질환 치료제 ‘휴미라’를 보유한 미국 애브비는 신약 특허 만료와 바이오시밀러 등장으로 위기에 처했다. 항암제 ‘레블리미드’로 고성장해 온 미국 브리스톨-마이어스 스퀴브(BMS)는 새로운 경쟁 항암제의 등장과 다른 파이프라인 개발에 뒤처지면서 고전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영원한 1등이 없다는 사실은 신생 바이오 기업(EBP, Emerging Biopharma)의 부상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아이킨 소장에 따르면 EBP가 세계 임상시험 시장에서 3분의 2를 차지한다. 10년 전만 해도 37%에 그쳤는데, 단 10년 만에 66%로 커졌다. 그는 “최근 중소형 EBP와 대형 글로벌 제약사 간 거래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킨 소장은 R&D 투자를 통해 세계 제약·바이오 산업의 흐름을 분석했다. 그는 “항암제 개발이 여전히 R&D의 최우선 순위에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세계 R&D 투자의 약 40%가 항암제 개발에 투입되고 있다. 비만 치료제 개발도 엄청난 투자를 받고 있다. 아이킨 소장은 “세계적으로 100여 개의 비만 치료 후보물질이 임상시험 단계에 돌입한 상태”라고 말했다.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 치료제 개발도 활발한 추세이고, 희소질환을 중심으로 한 세포·유전자 치료제(CGT) 개발도 주목 받고 있다고 했다.

그는 R&D 투자를 근거로 내년까지 글로벌 의약품 시장을 주도할 기업을 꼽았다. 항암제 시장에서는 미국 머크(MSD)와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비만 치료제 분야는 미국 일라이 릴리와 노보 노디스크를 선택했다. 신규 백신 시장에서는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미국 화이자를 꼽았다. 아이킨 소장은 “이들의 공통점은 세계 의료 시장에 전례 없는 혁신 치료제를 선보이고 있고 과학 데이터를 제시하며 약이 듣는 적응증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아이킨 소장은 한국에는 바이오시밀러 시장이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이큐비아는 2028년 세계 바이오시밀러 시장이 2023년 대비 약 2배 성장해 600억달러(약 82조 8900억원)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아이킨 소장은 “글로벌 빅파마들은 오리지널 의약품 특허 만료 위기에 처했지만, 한국 바이오시밀러 제조사들에는 엄청난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의약품 시장의 경쟁으로 의료비를 낮춰야 한다는 인식과 바이오시밀러 출시에 따른 의약품 시장의 급격한 가격 하락을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상존해 바이오시밀러 기업에 도전과제도 있다”고 했다.

아이킨 소장은 “제약·바이오기업에 자금난이란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했다. 최근 미국의 금리 인상 기조에 따른 글로벌 자본 시장 환경이 바뀌면서 세계 많은 바이오 회사가 자금난에 빠졌다. 아이킨 소장은 “안전성과 유효성 면에서 획기적인 개선을 가져다줄 수 있는 치료 후보물질과 기술이라면 어떤 분야든 글로벌 투자 시장과 오피니언 리더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라며 “시대 불문 항상 중요한 기본이지만, 팍팍한 시장 환경에서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