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와 세이렌(Ulysses and the Sirens), 1909년 작 유화, Herbert James Draper/Ferens Art Gallery, Hull Museums, UK

영국 화가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는 1909년 작(作) ‘율리시스와 세이렌’에서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을 그렸다. 호머는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오디세이’에서 영웅 오디세우스(라틴어로는 율리시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뱃길에서 바다 요정 세이렌이 부르는 노래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었다고 썼다.

세이렌은 그리스 신화에서 상체는 여인, 하체는 새로 묘사됐는데 나중에 유럽에서는 하체가 물고기인 인어로 모습이 바뀌었다. 초기 스타벅스의 로고에 나오는 인어 이미지가 바로 세이렌이다. 오늘날 경보(警報)를 뜻하는 사이렌(siren)은 뱃사람을 홀리는 세이렌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오디세우스가 바다에서 세이렌의 유혹을 이겼을지 몰라도 숲에서는 어려울지 모른다. 뱃사람이 세이렌 노랫소리에 홀려 바다로 뛰어들 듯, 반딧불이는 암컷을 흉내 낸 빛을 좇아 거미줄로 달려든다. 곰팡이는 죽은 딱정벌레를 조종해 짝짓기 춤을 추게 한다. 사방에서 짝을 부르는 신호가 온통 먹잇감을 유인하는 세이렌의 덫인 셈이다.

산왕거미가 붙잡고 있는 수컷 반딧불이. 평소 배 두 군데에서 빛을 냈지만, 거미가 있으면 암컷처럼 한 곳에서만 빛을 냈다. 이를 보고 수컷들이 거미줄로 달려왔다./Xinhua Fu

◇수컷이 암컷 흉내, 동성 친구를 유인

거미는 거미줄을 쳐놓고 지나가던 곤충이 걸리기를 기다린다. 산왕거미(Araneus ventricosus)는 한 발 더 나가 거미줄로 곤충을 불러들인다. 거미줄에 걸린 반딧불이가 내는 빛 신호를 조작해 다른 반딧불이를 거미줄로 유인한다.

리 다이친(Daiqin Li) 중국 후베이대 생명과학부 교수 연구진은 “산왕거미 거미줄에 걸린 수컷 반딧불이 짝짓기 신호가 암컷처럼 바뀌어 다른 수컷 반딧불이를 유인한다”고 지난 20일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발표했다.

여름밤 반딧불이는 꽁무니가 노란색이나 황록색으로 빛나면서 날아다닌다. 짝을 부르는 신호다. 반딧불이는 몸 안에서 루시페린이라는 물질이 루시페라아제라는 효소에 의해 산화되면서 빛을 방출한다. 이른바 생물발광(生物發光) 현상이다. 암수는 짝짓기 신호가 다르다. 이번에 연구한 애반딧불이(Abscondita terminalis) 수컷은 배에 있는 등불 두 개로 빠르게 연속해서 깜빡인다. 반면 암컷은 등불 하나만 느리게 깜빡인다. 덕분에 반딧불이는 멀리서도 짝짓기 상대를 구별할 수 있다.

연구진은 우한의 논과 연못에서 산왕거미 거미줄에 걸린 반딧불이가 대부분 수컷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약 거미가 반딧불이의 빛 신호를 조작해 수컷만 유인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거미줄에 걸린 수컷 반딧불이는 거미가 있을 때 발광 부위 두 곳 중 한쪽에서만 빛을 냈다. 영락없이 암컷이 내는 신호이다. 거미가 없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거미가 있는 거미줄에서는 수컷 반딧불이가 7마리 잡혔지만. 거미가 없는 거미줄에서는 두 마리밖에 잡히지 않았다.

거미가 어떻게 반딧불이의 신호를 조작하는지 아직 구체적인 원리는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진은 거미가 수컷 반딧불이를 거미줄로 감싸고 물어 발광 신호를 바꿨다고 주장했다. 거미의 독이 반딧불이의 발광 기관에 산소가 가지 못하게 막아 한쪽만 빛을 냈거나, 곤충의 신경신호 전달에 영향을 미쳐 반딧불이가 스스로 한쪽만 빛을 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했다.

수컷 집파리(위)가 곰팡이에 감염돼 온몸에 흰 포자가 가득한 암컷에 접근한 모습. 수컷이 곰팡이 조종을 받는 좀비 암컷과 짝짓기를 시도하면 포자가 퍼진다./덴마크 코펜하겐대

◇성페로몬 뿌리고 짝짓기 춤도 모방

다른 거미는 짝을 부르는 향수인 성페로몬도 모방한다. 페로몬은 곤충이 공기 중으로 방출하는 호르몬이다. 미국 켄터키대 연구진은 2002년 볼라스 거미(Mastophora hutchinsoni)가 나방 암컷의 성페로몬을 흉내내 수컷 나방들을 유인한다고 발표했다.

거미는 밤마다 다른 시간대에 각각 다른 나방을 유인했다. 그때마다 다른 페로몬을 흉내 냈다. 볼라스 거미는 거미줄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끝에 끈적끈적한 구슬이 달린 실을 매달아 놓고, 암컷 나방의 성페로몬을 모방한 화학물질을 방출한다. 수컷 나방이 암컷 나방을 찾으러 오면 거미는 거미줄 올가미를 휘둘러 먹이를 낚아챘다.

곰팡이도 곤충의 짝짓기를 이용해 포자를 퍼뜨릴 대상을 유인한다. 덴마크 코펜하겐대 연구진은 2022년 ‘국제미생물생태학회 저널’에 수컷 집파리가 곰팡이에 감염돼 죽은 암컷에게 더 많이 유인되는 것을 실험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수컷이 좀비 암컷에 덤비면 포자들이 한 번에 뿜어져 더 빨리 퍼질 수 있다. 수컷도 포자를 몸에 묻혀 더 먼 곳에 퍼뜨릴 수 있다. 연구진은 실험을 통해 수컷은 곰팡이에 감염된 좀비 암컷을 그냥 냉동한 암컷보다 5배나 더 많이 찾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연구진은 곰팡이 포자가 수컷의 성적 행동을 극대화하는 최음제 같은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곰팡이에 감염돼 꽃을 물고 죽은 병대벌레. 좀비처럼 가끔 날개를 펼쳐 동료를 유인해 포자를 퍼뜨린다./미 아칸소대

병대벌레와 매미도 좀비가 돼 짝짓기 춤을 춰 동료들도 죽음으로 유인한다. 지난 2017년 미국 아칸소대 연구진은 북미(北美) 대륙에 사는 딱정벌레인 미역취 병대벌레가 곰팡이가 조종하는 대로 꽃을 물고 죽는다고 발표했다. 놀랍게도 병대벌레는 죽은 지 15~20시간 지나면 갑자기 날개를 펼친다. 다른 벌레가 이 모습을 보고 짝짓기를 시도하면 곰팡이 포자가 더 잘 퍼진다.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 연구진은 2020년 국제 학술지 ‘플로스 병원체’에 “곰팡이가 좀비 수컷 매미가 암컷의 짝짓기 행동을 모방하도록 조종해 포자를 퍼뜨린다”고 밝혔다. 곰팡이에 감염된 매미는 좀비가 돼 날아다니며 포자를 퍼뜨린다. 심지어 수컷 매미가 암컷이 짝을 부를 때처럼 날개를 튕기기까지 한다. 수컷 매미들이 암컷으로 착각하고 짝짓기를 시도하면 포자가 더 많은 매미에게 퍼진다. 자연의 사랑에는 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참고 자료

Current biology(2024), DOI :https://doi.org/10.1016/j.cub.2024.07.0

The ISME Journal(2022), DOI: https://doi.org/10.1038/s41396-022-01284-x

PLoS Pathogen(2020), DOI: https://doi.org/10.1371/journal.ppat.1008598

Journal of Invertebrate Pathology(2017), DOI: https://doi.org/10.1016/j.jip.2017.05.002

Chemoecology(2002). DOI: https://doi.org/10.1007/s00049-002-83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