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를 먹잇감으로 삼아 ‘개미귀신’으로 불리는 명주잠자리 애벌레는 함정을 파놓고 개미를 기다리는 습성이 있다. 개미들에게는 저승사자처럼 무서운 존재지만 정작 개미귀신 자신이 천적을 만나면 죽은 척하며 위기를 넘긴다. 마치 이솝우화 ‘곰과 나그네’의 주연배우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영국 브리스톨대 연구진이 죽은 척 드러누운 개미귀신의 연기 시간이 바닥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 플로스 원에 최근 발표했다. 연구진은 깊이 2.3㎜ 얕은 모래, 깊이 4.6㎜ 모래, 종이 등 세 가지 환경에서 개미귀신의 죽은 척하는 행동을 실험했다. 분석 결과 종이처럼 바닥을 뚫고 내려가기 어려울수록 개미귀신이 죽은 척하는 시간이 짧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개미귀신이 딱딱한 바닥을 벗어나 안전하게 숨을 곳을 빨리 찾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개미귀신처럼 천적을 만난 동물이 죽은 척하는 행동을 ‘타나토시스(thanatosis)’ 또는 ‘의사(擬死)’라고 한다. 도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종의 사망 흉내로 죽을 위기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이 방법이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천적이 죽은 먹이를 싫어하는 경우에는 효과가 있다. 3년 전 연구에서 개미귀신은 무려 61분 동안 죽은 척하는 모습이 관찰됐고, 당시 연구진 실험에서는 ‘죽은 척하기’가 개미귀신의 생존율을 약 20% 높인 것으로 나타났다.
개미귀신 외에도 죽은 척하는 동물들은 여럿 있다. 주머니쥐는 잡아먹힐 위기에 놓이면 갑자기 쓰러져 혀를 내고 항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액체를 배출하며 죽은 척을 한다. 무당벌레도 천적을 맞닥뜨리면 땅바닥으로 툭 떨어져 죽은 체를 하면서 악취 나는 액체를 흘린다.
수컷이 싫어서 죽은 척하는 동물도 있다. 스위스 취리히대 연구진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별박이왕잠자리 암컷은 교미하려고 달려드는 수컷을 따돌리려고 죽은 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 산개구리 암컷도 수컷을 피하려고 몸을 경직시켜 죽은 체한다. 이와는 반대로 닷거미는 암컷이 교미 도중 수컷을 잡아먹는 습성이 있어 수컷이 죽은 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