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톱(TOP) 전략연구단으로 선정된 ‘초거대 계산 반도체 전략연구단’이 연산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나선다. 사진은 지난 11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차세대반도체연구소에서 전략연구단 연구원들이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한 연구를 하는 모습이다. /고운호 기자

“초거대 계산 반도체가 완성되면 이런 형태로 기판이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비슷한 수준의 연산을 할 수 있는 양자 컴퓨터보다 차지하는 면적이 훨씬 작고, 상온에서도 작동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죠.”

지난 11일 서울 성북구에 자리 잡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에서 만난 구현철 초거대 계산 반도체 전략연구단장은 가로 30㎝, 세로 20㎝ 크기의 기판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반도체 모듈 총 9개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으로, 가운데 모듈에는 앞으로 완성될 초거대 계산 반도체가 들어갈 자리가 비어있었다. 연구소는 반도체 증착기 10여 대와 마이크로·나노 팹(반도체 공정 시설) 등을 갖추고 첨단 반도체를 연구하고 있다. 이곳에서 앞으로 5년간 연구를 통해 상용화 가능한 ‘초거대 계산 반도체’가 탄생할 전망이다.

그래픽=이진영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 자율 주행 등 복잡한 연산이 필요한 기술 혁신이 가속화되면서 반도체 기술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강국으로 세계 시장을 선점했지만 상대적으로 컴퓨팅 반도체 분야에서는 시장 점유율이 미미한 상태다. 미국, 일본, 중국, 유럽 등 주요 선진국이 반도체 기술 역량 강화를 위해 지원을 확대하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차세대 컴퓨팅에 활용할 ‘초거대 계산 반도체’ 개발이 시작됐다.

◇“양자 컴보다 빨리 산업화”

현대의 컴퓨팅 기술이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분야가 있다. 일기예보, 재난 예측, 신약 개발 등 수많은 경우의 수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분야가 대표적이다. 몇 시간 후의 날씨는 예측이 쉽지만 한 달 후의 날씨는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는 수많은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계산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의 컴퓨팅 기술이 활용하는 기존의 연산 기술은 이런 변수들을 모두 일일이 순차적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변수가 많아질수록 오랜 시간이 걸린다. AI 반도체로 최근 각광받고 있는 엔비디아 그래픽 처리 장치(GPU)의 경우에도 병렬 방식으로 계산 속도를 올렸으나 기존의 계산 방식을 벗어나지 못해 전력 소모가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픽=이진영

수많은 변수를 빠르게 계산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연산 방식으로 ‘랜덤 연산’이 주목 받고 있다. 이는 여러 변수를 동시에 계산하며 조합의 최적화를 계산해 내는 방식이다.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이 높은 여러 답을 추출한 후 이를 역산해 정답을 맞힌다. 역방향 계산이 가능한 것도 기존 연산 방법과 다른 특징이다. 수학적으로 풀이가 어려워 암호화에 사용되는 소인수분해도 빠르게 할 수 있는 이유다. 고난도 계산에서 기존 연산이 걸리는 시간의 1000분의 1로 대폭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구현철 단장은 “초거대 계산 반도체는 랜덤 연산이 가능하도록 하고, 기존 반도체 공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자 컴퓨터보다 빠르게 산업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글로벌 시장 규모 70조원에 달해

지난 6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는 ‘초거대 계산 반도체 전략연구단’이 정부 출연 연구 기관(출연연) 융합 연구 협력 사업인 ‘글로벌 톱(TOP) 전략연구단 사업’으로 선정됐다고 밝혔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총괄을 맡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재료연구원,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등 총 다섯 기관이 참여한다. 서울대, KAIST, 한양대, 중앙대, 부산대 등 대학과 협력도 예정돼 있다. 초거대 계산 반도체는 자율 주행, 물류 경로 최적화 등 실생활에 다양한 활용이 가능한 만큼 국내 대기업이 기술 수요 의향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래픽=이진영

차세대 반도체 분야의 글로벌 시장 규모는 내년에 70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초거대 계산 반도체 전략연구단은 향후 5년의 사업 기간 동안 차세대 컴퓨팅 반도체 선도 기업인 엔비디아, IBM, 구글 등과의 기술 격차를 3년 이내로 줄인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차세대 컴퓨팅 분야에서 가장 앞선 미국에 맞먹는 기술 혁신을 이룬다는 각오다.

연구단 측은 “초거대 계산 반도체 개발 후 기술 이전에 성공하면, 연간 수백억원 규모의 로열티 수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글로벌 TOP 전략연구단

과학기술 분야 정부 출연 연구 기관(출연연) 간 융합 연구체다. 출연연의 역량을 집중해 대형 성과를 낸다는 목표로 출범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지원하는 사업으로 초거대 계산 반도체 전략연구단을 포함해 5개 연구단이 선정됐다.

조선일보·국가과학기술연구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