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의 설계도는 세포핵의 유전자에 담겨 있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기본 원리를 밝힌 두 과학자에게 돌아갔다. 과학계는 모든 생명 현상을 이해할 길을 열면서 질병을 치료할 무기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 노벨위원회는 7일 “빅터 앰브로스(Victor Ambros·70) 미국 매사추세츠 의대 교수와 개리 러브컨(Gary Ruvkun·72) 하버드 의대 교수가 마이크로RNA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주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두 사람은 상금 11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3억 6400만원)를 나눠 받는다.
생명의 설계도는 세포핵에 있는 유전물질인 디옥시리보핵산(DNA)이다. DNA 유전정보는 필요한 부분만 메신저리보핵산(mRNA)으로 옮겨지고, 최종적으로 생명 현상을 좌우할 다양한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길이가 짧은 RNA인 이른바 마이크로RNA는 다른 mRNA에 달라붙어 단백질 합성을 차단한다.
앰브로스 교수와 러브컨 교수는 이 마이크로RNA를 발견하고, DNA의 유전정보를 mRNA로 옮기는 전사 후 유전자 조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밝혀낸 업적을 인정 받았다.
◇30년 전 새로운 유전자 발현 밝혀
마이크로RNA 발견은 40년에 걸친 연구의 성과다. 1960년대 과학자들은 어떤 특정 단백질(전사인자)이 DNA의 특정 영역에 결합해 어떤 mRNA를 만들지 결정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후로 전사인자 수천 개가 발견되면서 학계는 오랫동안 유전자 발현 조절에 대한 주요 원리가 해결됐다고 봤다.
올해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1993년 새로운 수준에서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전까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었다.
앰브로스 교수와 러브컨 교수는 1980년대 후반, 2002년 노벨상 수상자인 로버트 호비츠 교수 실험실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들은 여기서 예쁜꼬마선충을 관찰하며 신경세포와 근육세포 등 다양한 세포 유형이 어떻게 조직을 형성하는지 연구했다. 근육에서는 근육세포가, 신경에서는 신경세포가 만들어진다. 세포 유형에 따라 매우 뚜렷한 특징이 나타난다. 각 세포마다 올바른 유전자 세트만 발현되도록 활성화하는 덕분이다
두 사람은 특히 다양한 유전자 발현 시기를 조절해 각 세포 유형이 적절한 시기에 만들어지도록 하는 유전자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두 가지 돌연변이인 선충 유전자인 LIN-4와 LIN-14를 연구했다. 박사후연구원을 마친 앰브로스는 하버드대에서 LIN-4 돌연변이 유전자가 비정상적으로 짧은 RNA 분자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이 짧은 RNA 분자가 LIN-14를 억제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당시 러브컨 교수는 하버드 의대 산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과 하버드 의대에서 LIN-14 유전자의 조절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그 당시 학계에 알려졌던 것과는 달리, 유전자 조절이 유전자 발현 과정의 후반 단계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한 실험을 통해 LIN-4 유전자가 짧은 RNA를 구성하는 염기서열이 LIN-14 유전자가 mRNA로 전사되면 중요한 부분에 있는 서열과 상보적으로 결합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RNA 유형인 마이크로RNA의 존재와 역할을 밝혀낸 셈이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1993년 국제 학술지 ‘셀(Cell)’에 실렸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들의 연구 결과가 빛을 보지 못했다. 특이한 유전자 조절 메커니즘이 예쁜꼬마선충처럼 비교적 단순한 생물에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브컨이 2000년 Let-7 유전자에 의해 암호화된 또 다른 마이크로RNA를 발견하면서 분위기가 역전됐다. 이 유전자는 동물계 전체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학계에는 인간에게 수천 개가 넘는 마이크로RNA가 존재하며, 마이크로RNA에 의해 유전자 발현이 조절된다는 사실이 정설로 굳혀졌다. 즉, 마이크로RNA 없이는 세포와 조직이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않는다.
이후 마이크로RNA가 생리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 또한 밝혀졌다. 마이크로RNA가 유전자 발현을 비정상적으로 조절하면 암이나 선천성 난청, 골격 장애 등을 유발할 수 있다. 마이크로RNA 생성에 필요한 단백질 중 하나에 돌연변이가 생겨도 다양한 장기와 조직에서 암이 발생할 수 있다.
◇유전자 조절 길목 찾아 질병 치료의 새 길 열어
학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들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왔다. 기초 연구 성과지만 환자 치료에 쓰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마이크로RNA를 모방해 만든 RNA치료제는 같은 방법으로 특정 유전자가 과도하게 작동하면서 생기는 병을 막을 수 있다.
남진우 한양대 생명과학과 교수(한국연구재단 차세대바이오단장)는 “수상자 두 사람은 1990년 이전만 해도 존재 자체를 몰랐던 마이크로RNA를 발견을 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냈다”며 “최근에는 이를 이용해 질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에도 쓰이고 있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이미 간질환을 치료하는 마이크로RNA 치료제가 미국에서 5개 허가받았다. 현재 바이러스 치료제도 여럿 임상시험 중이다. 예를 들어 간염바이러스의 유전자를 공략할 마이크로RNA를 설계하면 난치병인 만성간염을 치료할 수도 있다.
국내 대표적인 마이크로RNA 연구자인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석좌교수는 “인간 유전자는 대부분 마이크로RNA의 영향을 받는데, 이번 노벨상 수상자들은 이 마이크로RNA가 어떻게 유전자 조절을 하는지 초기에 알아냈다”며 “최근에는 이를 응용해 암을 비롯한 다양한 질환 치료제가 개발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수상자들이 마이크로RNA의 유전자 조절 과정을 밝혔다면, 김 교수는 마이크로RNA의 생성, 작동 과정을 잇달아 세계 최초로 규명해 늘 한국인 노벨상 수상 1순위로 꼽혔다. ‘여성과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로레알-유네스코 세계여성과학자상을 받았으며, 국내에서는 호암상, 아산의학상, 최고과학기술인상을 휩쓸었다.
김 교수는 현재 기초과학연구원(IBS) RNA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김 교수는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유전자 조절에 의해 좌우된다”며 “그 길목인 마이크로RNA를 연구하면 질병 유전자만 골라 치료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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