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노벨 생리의학상 발표로 시작한 노벨 과학상 발표가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 발표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올해 노벨 과학상을 꿰뚫는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이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 위원회는 9일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데이비드 베이커 미국 워싱턴대 교수와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 존 점퍼 구글 딥마인드 수석연구원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예측하거나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단백질을 디자인하는 AI를 연구한 성과를 인정받았다.
앞서 8일 노벨 위원회는 올해 물리학상 수상자로 AI의 대가로 꼽히는 존 홉필드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제프리 힌튼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를 선정했다. 이들은 1980년대부터 현존하는 AI의 기반이 되는 머신러닝과 인공신경망 분야를 개척해 왔다. 노벨 과학상 세 분야 중 두 분야에서 AI 연구자가 수상한 것이다.
AI 기술은 2016년 3월 이세돌과 바둑 AI ‘알파고’의 대결 이후 전 세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구글 딥마인드가 2018년 단백질 구조 예측 AI ‘알파폴드’에 이어 2020년에는 알파폴드2를 공개하면서 단순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기술로 부상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만에 ‘최고 과학상’으로 꼽히는 노벨상을 석권하며 2020년대가 ‘AI의 시대’라는 걸 보여줬다. 올해 노벨상을 지켜본 과학자들은 AI가 단순한 기술적인 도구를 넘어서 과학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전문가들은 AI의 영향이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석차옥 서울대 교수는 9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노벨 화학상 설명회에서 “1900년대 초에는 양자역학과 관련된 성과들이 노벨상을 받았다. 이에 준하는 게 2000년대 초의 AI”라며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물리학이나 화학 분야에서 파급 효과가 상당했는데, AI도 여러 분야에서 많은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라 본다.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기초과학인 셈”이라고 말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받은 AI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분야에서 실제 성과를 낸 지도 몇 년 되지 않았다. 물리학상을 받은 제프리 힌튼 교수가 딥러닝을 선보인 건 2012년으로 불과 12년 전이다. 화학상을 받은 연구자들이 핵심 성과인 알파폴드와 로제타폴드를 발표한 건 그보다 짧다. 2010년대 이후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이 핵심 연구 성과를 내고 노벨상을 받기 까지 평균 29년이 걸린 것을 감안하면 AI 연구자들의 수상이 이례적으로 빠르다. AI 스타트업인 페블러스의 이정원 부대표는 “물리학상을 AI가 받은 건 의외”라며 “이론을 세우고 증명하는 식의 과거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만큼 AI의 빠른 발전이 과학은 물론이고 일상 생활 전반에 큰 파급력을 주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노벨 위원회는 화학상 수상자들의 업적을 소개하면서 “단백질의 구조를 쉽게 시각화할 수 있다는 것에 정신이 아찔해진다”며 “인류의 이익을 위해 현기증 나는 개발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외에 AI는 물리학, 화학을 넘어서 천문학 분야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관측데이터를 분석하거나 올림피아드 수준의 복잡한 수학 문제를 해결하는 데까지 발달했다.
물리학상에 이어 화학상에서도 AI 연구자가 수상자로 꼽히자, 노벨상 발표 현장에서는 ‘두 상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닌가’하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하이너 링케 노벨 화학상 위원회 위원장은 “노벨상은 각각 독립적”이라며 “오늘날 그리고 과거의 역사에 비춰보았을 때 얼마나 획기적인 발견인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