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저녁 존 로저스 교수(사진 중앙, 회색 셔츠)와 그의 제자 20여 명이 부산의 한 식당에 모였다. 이날 제자들은 로저스 교수의 장수를 빌자며 십장생도 앞에서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김태일 성균관대 교수

지난 16일 저녁 부산의 한 한정식집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외국인이 들어섰다. 그러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한국인 과학자 20여명이 일제히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날 모임의 주인공이자 의공학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인 존 로저스(John Rogers·57)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였다.

로저스 교수는 이번에 16일부터 부산에서 열린 한국화학공학회 추계 학술대회의 기조연설을 위해 방한했다. 로저스 교수를 만나기 위해 전국의 대학과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제자들이 부산으로 모인 것이다. 하지만 이번 만남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매년 한 번씩 한국을 찾는다. 로저스 교수는 작년 여름에 이어 올 가을에도 제자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로저스 교수는 고분자 물질과 전자회로를 결합해 얇고 잘 휘어지는 센서를 개발하는 소프트 일렉트로닉스(soft electronics) 연구를 이끌고 있다. 그의 연구는 디지털 헬스케어에 활용된다. 판박이처럼 몸에 붙여 인체 상태를 파악하는 전자피부가 대표적인 예이다. 동·식물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로저스 교수는 학계에서 알아주는 친한파(親韓派) 학자이다. 지금까지 로저스 교수의 연구실을 거쳐 간 한국인 제자만 70명에 달한다. 2004년 첫 한국인 제자를 박사후 연구원으로 받은 이후 20년 동안 한국과의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로저스 교수는 “연구실을 거친 학생 중 3분의 1은 한국인”이라며 “의도한 결과는 아니지만, 아마 연구실에서 좋은 경험을 쌓은 제자들이 한국에 가서 입소문을 낸 덕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로저스 교수의 한국인 제자들은 “이전까지는 나노 연구의 권위자 채드 머킨 교수가 노스웨스턴대에서 한국인 제자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했는데, 로저스 교수가 그 기록을 깼을 것”이라며 “로저스 교수는 모든 제자의 소속 학교와 연구 주제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저스 교수는 제자들이 만들어준 ‘소맥’ 잔을 천천히 비우며 차근차근 제자들의 근황을 확인했다. 가족 이야기부터 연구 진행과 연구비 상황까지 세세히 물어보는 멘토의 모습이었다. 로저스 교수 연구실에서 만나 결혼한 부부가 뒤늦게 들어오자 기자에게 그들에 대해 설명해 주곤 했다. 어느새 자신처럼 흰머리가 난 제자의 머리를 만지며 웃기도 했다.

로저스 교수는 이날 제자인 송영민 광주과학기술원(GIST) 교수가 GIST 최초로 특훈 교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박수 치며 즐거워했다. 몇 달 동안 제자의 얼굴이 담긴 플래카드가 교내를 장식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경의를 표한다며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2013년 5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곤충의 눈을 본뜬 초광각(超廣角) 디지털 카메라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모임에서 만난 제자들은 로저스 교수를 ‘열정적인 연구자이자 항상 영감을 주는 멘토’로 기억하고 있었다. 로저스 교수 연구실에 박사후 연구원으로 있다가 국내 대학에 자리 잡은 한 교수는 “주말 새벽 5시에 연구와 관련해 연락이 올 만큼 열정적이었다”며 “아무리 긴 논문 초안도 1~2시간 내로 수정해서 답변을 보내줬다”고 회상했다.

존 로저스 교수가 지난 16일 성균관대에서 강연하고 있다./김태일 성균관대 교수

로저스 교수와 제자들의 끈끈한 관계는 연구로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제자인 오세용 한양대 교수와 박윤석 경희대 교수 연구진과 함께 인공 심장의 심혈관 정보를 실시간으로 측정하는 3차원 바이오 센서를 개발했다.

로저스 교수에게 왜 한국인 제자들과의 협업을 계속하는지 묻자 “우수하고, 유능하다(Good, talented)”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항상 제자들은 앞서간 연구를 하고 있어 대화하는 것이 즐겁고, 영감을 받는 경우도 많다”며 “실제로 제자들끼리 협력해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날 자리에서는 일주일 전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휩쓴 인공지능(AI)도 화두에 올랐다. 로저스 교수는 곧바로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AI 연구자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를 검색해 보더니 그의 논문이 다른 연구자의 논문에 인용된 횟수가 86만회에 달한다며 감탄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연구 과정에 AI를 사용해도 될 지로 이어졌다. 제자들은 유료로 대화형 AI인 챗GPT를 사용하거나 아예 AI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로 나뉘었다. 로저스 교수는 “아직 학생들에게 AI를 사용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며 “AI가 사고 능력을 저해할 수도 있고, 답이 나오는 과정이 투명하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밝혔다.

다만 자신의 연구 분야에 AI를 접목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봤다. 로저스 교수는 “현재 집중하고 있는 생체 기기가 더 발전된 뒤에는, 기기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AI와 결합한다면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 제자는 “앞으로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가 더욱 발전한다면 다음 노벨상은 존 로저스 교수가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1년 만에 마련된 로저스 교수와 제자들의 저녁 식사는 3시간 동안 이어졌다. 마지막은 로저스 교수의 장수를 빌며 십장생도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 건물 입구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참고 자료

Science Advances(2024), DOI: https://doi.org/10.1126/sciadv.ado7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