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더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연구개발(R&D) 예산으로 지원하는 기초연구사업 중 최상위 등급이다.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연구자가 심화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지난 8월 올해 글로벌 리더연구 사업을 선정했는데 내로라하는 연구자 110명이 지원했지만 단 9명만 선정됐다. 한 번 지원되면 연평균 8억원씩 몇 년에 걸쳐 지원을 받는다.
김근수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는 1982년생으로 글로벌 리더연구자로 선정된 연구자 가운데 가장 젊다. 이제 갓 40대에 접어든 나이지만, 이미 국내 고체물리학과 응집물질물리학 분야에서는 학계를 이끌어갈 리더연구자의 반열에 들었다.
김 교수는 최근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김 교수 연구팀은 고체 상태의 물질에서 전자가 액체와 고체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전자 결정’ 조각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이 연구 결과는 지난 17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다. 한국연구재단의 안태규 자연과학단장은 김 교수의 연구에 대해 “노벨상을 받은 유진 위그너 교수가 1934년에 이론적으로 예측한 걸 세계 최초로 실험으로 입증한 것”이라며 “초액체, 초유체, 초전도체 같은 다양한 분야에 응용할 수 있는 연구 성과”라고 소개했다.
국내에서 화제가 됐던 초전도는 전류가 아무런 저항 없이 흐르는 현상이다. 일반적인 초전도체는 섭씨 영하 270도 이하의 극저온에서만 특성을 나타낸다. 고온 초전도체는 그보다 높은 온도에서 초전도를 나타낸다. 김 교수는 지난 7월에도 국제 학술지 ‘네이처 피직스’에 고체에서 빛으로 관측할 수 없는 ‘암흑 전자’의 존재를 세계 최초로 밝혀낸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전자 결정 발견과 암흑 전자 존재 규명 모두 현대 물리학의 오랜 난제인 고온초전도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는 연구 성과다. 이런 혁신적인 연구 성과가 가능한 비결은 뭘까. 지난 18일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에서 김 교수를 만나 인터뷰했다.
–전자 결정 조각의 의미는.
“고체 물질에서 원자들은 규칙적인 배열을 이뤄 움직일 수 없지만, 전자들은 기체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물질에 전압을 걸어 전자의 흐름을 만들어주면 반도체 기술에서 전기 신호로 활용하는 전류가 발생하는 이유다. 그런데 노벨상을 받은 헝가리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는 전자간 서로 밀어내는 힘을 고려해 전자들이 규칙적인 배열을 이뤄 움직일 수 없는 ‘전자 결정’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입자이자 파동인 전자가 결정을 이루는 걸 실제로 증명하면 고온초전도체 같은 여러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전자 결정 조각을 처음으로 찾은 비결은.
“2021년 알카리 금속을 표면 도핑(불순물 추가)한 물질에서 액체와 같은 전자 상태를 발견했다. 이 연구 결과도 네이처에 게재했다. 후속 연구로 더 적은 양의 알카리 금속이 도핑된 물질의 전자 상태를 연구하던 중 아주 미세한 전자 결정 조각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주제로 계속 연구를 했기 때문에 데이터를 보자마자 전자의 액정 같은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김 교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의 기초연구사업이 이번 연구 성과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이번 전자 결정 조각 발견의 기반이 된 2021년 연구 성과는 기초연구사업 가운데 중견연구 과제를 통해 나왔다. 김 교수는 2020년 중견연구 과제를 받았고 이듬해 글로벌 리더연구 과제에 선정되면서 후속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선행 연구의 성과가 후속 연구를 통해 심화·발전되어 자연 현상의 근원에 더욱 근접한 연구가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리더연구 과제에 최연소로 선정된 비결은.
“사실 한 번에 선정된 게 아니다. 삼수 만에 붙었다. 미국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하고 2013년 11월에 한국에 돌아와 포항공대에 교수로 부임했다. 2017년 연세대로 자리를 옮겼다. 연세대로 옮기면서 리더연구에 지원을 했는데 떨어졌고, 이후 3년 짜리 중견연구 과제를 수행했다. 그 뒤에 다시 리더연구에 지원했는데 또 떨어졌다. 다른 연구비도 없는 상태여서 6개월 정도 굉장히 힘든 시기를 겪었고, 1년짜리 중견연구 과제에 선정되면서 한숨을 돌렸다. 다행히 중견연구 과제를 하면서 2021년 네이처 논문이 나왔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세 번째로 리더연구 과제에 도전해서 비로소 선정됐다.”
–다른 연구자보다 이른 시기에 리더 연구에 도전한 이유는.
“내가 몸 담고 있는 고체물리학, 응집물질물리학 같은 분야는 기초연구이다 보니 경제적 파급 효과를 중장기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단기적인 목표를 원하는 기업들의 연구비 펀딩(지원)을 받기가 어려운 분야다. 정부의 연구비 지원이 절대적이다. 미국이나 중국은 대학에 새로운 교수가 부임해서 연구실을 차리면 15억원 정도 지원을 한다. 그런데 국내 대학은 최고 수준이 3억이나 4억원 정도다. 우리 분야는 연구비 지원을 받기가 쉽지 않은데, 연구 장비는 고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학의 지원도 크지 않기 때문에 최고 수준의 연구를 위한 장비를 빨리 갖추려면 연구비 지원 규모가 큰 리더연구 과제에 도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2021년 리더연구 과제에 선정됐다. 필요한 장비는 모두 갖췄나.
“올해가 4년 차인데 이제 장비 구축이 마무리됐다. 이 분야 연구를 위해서는 고체 물질의 안의 전자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고체 안의 전자를 빛으로 강하게 때려서 전자가 튀어나오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전자의 에너지와 운동량을 모두 알 수 있다. 각분해광전자분광 실험 장비가 필요한데 가격이 15억원 정도다. 이 장비를 갖추면서 이제는 우리 실험실에서 자체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와 실험을 할 수 있다. 방사광가속기도 필요한데 이번 연구에서는 미국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가 운영하는 방사광가속기를 썼다.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빛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해 강한 빛을 내는 장비다. 앞으로 오창에 방사광가속기가 생기면 미국까지 가지 않고도 이런 실험도 할 수 있다.”
–다음 연구 주제나 목표는 무엇인가.
“리더 연구 과제가 올해를 제외하면 2년 남았다. 첫 3년은 만족할 만한 성과가 없었지만, 올해 두 차례 논문이 나왔고, 남은 2년 동안 추가 연구로 국제적으로 수월성 있는 연구를 하고 마무리하고 싶다. 우리 연구의 활용 방안이 꼭 고온초전도체만 있는 건 아니지만, 대중의 입장에서는 고온초전도체에 대한 관심이 큰 것 같다. 고온초전도의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제공하겠다.”
–리더연구 과제를 목표로 하는 연구자에게 조언을 한다면.
“연구자 입장에서는 리더연구 과제가 큰 영광이다. 동시에 큰 압박도 된다. 리더연구 과제를 수행하는 것 자체가 무언가를 증명해서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이런 압박감이 더 큰 성과를 내는 비결이 되기도 한다. 한국은 교수를 더는 성장할 주체로 보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리더연구 과제가 새로운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고 본다.”
참고 자료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s41567-024-02586-x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1-03683-0
Nature(2021),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1-036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