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치료제 시장에 진출하는 국내 기업은 대부분 아이디어와 기술을 보유한 초기 스타트업들이다.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인·허가 이후의 생존, 결국 돈 문제다. 제품화 성공과 시장에서 상업적 성공은 별개인데, 시장에서 수익화하기까지 비용이 따른다.
세계적으로 가장 일찍이 디지털치료제 시장을 연 건 미국이었다. 미국도 페어테라퓨틱스, 베터테라퓨틱스, 아킬리 같은 스타트업들이 디지털 치료제 시장을 개척했다. 이들은 세계 시장의 주목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는 듯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모두 연이어 파산해, 나스닥 시장에서 상장 폐지되거나 다른 기업에 헐값으로 매각됐다.
업계와 시장 전문가들은 미국 디지털치료제 기업들이 고전한 주 배경으로 신생 사업이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가 조성되지 않은 점을 꼽는다. 국내에서 디지털치료제 사업을 하는 연구자와 기업인들도 국내 시장이 기술 연구·개발(R&D) 단계에서 이뤄지는 투자와 지원은 많은 반면, 시판 허가 이후 기업이 시장에 안착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책은 미미해 이를 강화해줄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시장 안착까지 자금 확보가 관건
미국과 유럽이 한국보다 일찍이 디지털치료제를 출시하며 시장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자금 조달 규모가 더 크고 활발한 투자 시장 환경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페어테라퓨틱스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최초로 승인한 디지털치료제를 개발한 회사다.
2013년 설립된 페어테라퓨틱스는 2017년 약물중독 치료제를 시작으로 다른 중독과 불면증 치료용 디지털치료제를 잇따라 개발해 FDA 허가를 받았다. 회사는 제품 출시를 이어가며 미국 시장에서 디지털치료제 선도 기업이 된 것은 통 큰 투자덕분이었다. 글로벌 큰 손인 일본 소프트뱅크의 벤처 캐피털 펀드,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 스위스 글로벌 제약사 노바티스 등으로부터 2억5000만달러(약 3419억원) 이상을 투자받았다.
대형 투자자를 만난 스타트업은 글로벌 시장의 큰 관심을 받고, 다시 기업가치가 더 뛴다. 인재와 자금을 확보하는 데에도 유리하다. 실제 2021년 이 회사는 SPAC(기업인수목적회사) 합병을 통해 나스닥 시장에 우회 상장했고, 이를 통해 4억5680만달러(6250억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장 당시 페어테라퓨틱스의 기업가치는 약 16억달러(약 2조원)에 달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과 아이디어가 좋고, 대형 자금을 유치해도, 시장에서 구매자들로부터 외면당하면 한 순간에 존폐 위기에 처한다. 페어테라퓨틱스는 지난해 3월 파산했다. 세계 첫 제2형 당뇨병 디지털치료제로 FDA 허가를 받은 베터테라퓨틱스도 파산 절차를 밟고 있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디지털치료제를 출시한 아킬리는 올해 버추어테라퓨틱스에 헐값에 매각됐다. 기업가치가 조 단위로 평가되던 나스닥 상장사인데, 매각가는 500억원도 안됐던 것으로 알려져 국내 업계에도 충격을 안겼다.
◇수익 내려면 보험 시장 진입 필수
회사들은 미국 시장에서 디지털치료제 처방과 판매가 부진하면서 수익성이 크게 악화됐다. 냉혹한 투자 시장마저 지갑을 닫는 탓에 추가 투자 유치에 실패했고, 자금 조달 난항을 겪다 인력 감축, 상장 폐지, 사업 매각 등 파산 절차를 밟았다.
업계는 미국도 보험 시장을 비롯해 디지털치료제 생태계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게 한계점이라고 진단했다. 디지털치료제 사업이 시장에서 수익을 내려면 결국 처방을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이 확대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보험 시장 진입이 중요한 것이다.
실제 코리 맥칸 페어테라퓨틱스 대표는 파산 발표 당일 소셜미디어 링크드인을 통해 “많은 디지털치료제 제조업체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보험사가 기술 적용을 꺼리는 데 기인한다”고 밝혔다. 이상규 연세대 보건대학원장은 “제품이 상당히 좋았고 의사들도 처방을 많이 했지만, 미국 최대 건강보험인 메디케어의 급여를 받지 못했고, 결국 대규모 영업 손실을 기록하면서 파산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디지털치료제 기업이 미국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건강보험 급여 시장 진입과 수가(보험이 정한 진료비) 정책 도입이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독일처럼 건강보험에 먼저 진입시킨 뒤 사후 평가를 통해 정식으로 급여 등재를 하는 것도 방법이다.
강성지 웰트 대표는 “개량신약에 가산 수가를 주듯, 소프트웨어 제품이 업그레이드될 때 수가를 가산 적용해 주는 방식의 지원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는 데 유지 보수 비용이 발생한다. 디지털치료제는 기존 의약품처럼 한 번 승인 후 똑같이 찍어내는 개념이 아니다. 소프트웨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계속 사후 검증하며 제품 성능을 향상시켜야 한다. 이런 특성을 제도적으로 반영해 줘야 한다는 의미다.
◇병원 전산에 빨리 적용돼야 처방 가능
병원 환경도 변화가 필요하다. 디지털치료제 처방과 활용이 병원 전산·진료 시스템에 빠르게 적용돼 유기적으로 작동돼야 하는데 현재 그렇지 못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로 인해 승인받은 디지털치료제가 의료 현장에서 처방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실제 환자에 처방되고 있는 불면증 인지개선 디지털치료제 ‘솜즈’는 승인된 지 11개월 만에야 처방을 시작했다. 지난 4월 허가 승인을 받은 뇌졸중 환자 시야장애 개선 디지털치료제 ‘비비드브레인’도 서울아산병원에서 지난 9월 12일부터 공식 처방이 시작됐다. 함께 승인을 받은 호흡 재활 운동 디지털치료제 ‘이지브리드’는 11월부터 처방이 시작될 예정이다.
회사들이 식약처 허가를 받고도 처방 속도를 빠르게 내지 못하는 데는 병원마다 다른 전산·처방 시스템이 한계로 지목됐다. 디지털치료제를 처방하려면 병원 전산 시스템과 연결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디지털치료제 업체 연구자는 “병원마다 쓰는 전산 시스템이 다르다 보니 디지털치료제와의 연동하는 과정이 필요해 처방 확대 목표 시점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문제를 겪고 있다”며 “앞으로 디지털치료제가 시장에 더 많이 나오면 해결될 문제이긴 한데, 아직은 사업 생태계가 조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의사들이 디지털치료제를 쉽게 처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는 뜻이다. 비비드브레인을 개발한 강동화 뉴냅스 대표(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는 “디지털치료제 처방이 확산되려면 병원 처방 시스템이 긴밀하게 연결돼야 하는데, 병원 시스템이 무겁고 복잡하다 보니 처방 확산에 어려움이 있다”며 “단지 우리 병원에서 처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병원, 여러 환자로 처방이 확산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편집자 주]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1등을 하는 산업 분야는 없다. 반도체 분야는 선두 그룹 경쟁에서 밀려 위기감이 커졌고, 제2의 반도체라 불리는 제약·바이오 분야는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정보과학(ICT) 기술과 의학을 접목한 디지털치료제 사업은 국내 기업이 글로벌 선두권에 설 수 있는 분야로 꼽힌다. 디지털치료제 시장과 산업이 태동 단계에 있고, 아직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기업도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치료제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의 성장 기회와 산업 육성을 위한 조건을 짚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