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가 닿는 부위에 패드 2개가 달린 헤드셋을 머리에 쓰면 저릿한 전기 자극이 가해진다. 2mA(밀리암페어) 전류가 두개골을 지나 뇌 전두엽을 자극한다. 우울증 환자들이 하루 30분씩 주당 3~5회, 총 10주간 이 자극을 받았더니 우울 증상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 병원에 갈 필요 없이 집에서 치료가 가능함을 확인한 것이다. 이는 스웨덴 헬스케어 기업 ‘플로 뉴로사이언스’의 헤드셋 임상 시험 결과의 일부 내용이다. 임상을 진행한 영국과 미국 공동 연구진은 집에서 우울증 환자의 증상을 치료하는 길이 열렸다고 밝혔다.

전류나 자기장 등으로 뇌를 자극해 치료 효과를 내는 ‘전자약’이 빠르게 대중화하고 있다. 전자약은 특정 신경을 직접 자극해 치료 효과를 내기 때문에 기존 화학 약물에 비해 부작용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과거에는 심장박동 조절기 등 체내에 삽입하는 형태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몸 밖에서 뇌 신경세포를 활성화하거나 억제하는 비침습형 전자약이 주류다. 가정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질환으로 치료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마케츠앤드마케츠에 따르면, 세계 전자약 시장 규모는 2024년 239억달러(약 32조원)에서 2029년 336억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그래픽=김하경

◇우울증 전자약 처방 9만건 넘어서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미국 텍사스대 등 공동 연구팀은 우울증 진단을 받은 18세 이상 환자 174명을 대상으로 한 우울증 전자약 임상 결과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의학’에 최근 게재했다. 10주간 87명은 각자의 집에서 헤드셋을 통해 전기 자극 치료를 받았고, 대조군 87명은 거짓 전기 자극을 받았다. 연구팀은 화상회의를 통해 이 과정을 감독했다. 연구 결과, 실제로 전기 자극을 받은 그룹의 45%가 우울증이 완화됐다고 답했다. 대조군(22%)의 2배 이상이다. 네이처는 “전자약은 항우울제나 심리 치료 같은 표준 치료법에 반응하지 않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국내에서도 우울증 전자약 투약이 늘고 있다. 헬스케어 기업 와이브레인이 개발한 우울증 전자약 ‘마인드스팀’은 누적 처방 9만건을 넘어섰다. 밴드를 머리에 두르면 미세 전류가 뇌를 직접 자극해 우울 증세를 완화하는 제품으로, 2021년 식약처 허가를 받았다. 와이브레인은 세라젬과 손잡고 마인드스팀의 가정용 버전인 ‘마인드핏’을 출시한다는 계획이다. 전류 강도를 더 낮춰 누구나 집에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헬스케어 업계 관계자는 “젊은 세대들이 특히 전자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들을 겨냥해 전자약 사용 방법도 더욱 편리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픽=김하경

◇암·알츠하이머도 공략

우울증 외에 다양한 질환을 전자약으로 치료하려는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15일 스위스 바이오 기업 노보큐어의 전자약 ‘옵튠루아’가 미 식품의약국(FDA)에서 전이성 비소세포폐암 치료법으로 시판 승인을 받았다. 옵튠루아는 가슴 부위에 패치를 붙이면 전기장이 형성돼 암세포의 분열을 막거나 암세포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치료 효능을 낸다. 앞서 임상 시험에서 폐암 환자의 생존 기간을 늘린다는 점이 확인됐다. 이번에는 다른 항암제와 함께 사용하는 병용 치료법이 FDA 승인을 얻었다.

국내 전자약 기업 리메드는 자기장을 통한 알츠하이머 치료에 나서고 있다. 이 회사는 삼성서울병원과 진행한 알츠하이머 환자 대상 임상 시험 결과를 지난 5월 미국의학협회 학술지 ‘JAMA 네트워크 오픈’에 게재했다. 먹는 알츠하이머 약보다 인지 기능 지표가 더 개선됐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리메드는 향후 임상을 통해 의료 기기 허가를 받겠다는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는 “약물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전자약 수요가 늘고 있다”며 “다양한 질환에 효능을 보이는 맞춤형 전자약이 개발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