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국 바이오 기업들을 견제하기 위해 발의한 ‘바이오 보안법’ 여파로 영미권 제약 회사들의 탈(脫)중국이 본격화하고 있다. 이 법안은 미 정부와 산하기관은 물론이고 정부 예산을 지원받는 기업도 중국의 대표적 바이오 기업들과 거래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제약사들은 중국을 배제한 의약품 공급망 구축에 나섰다. 지난 9월 초당적 지지를 받고 미 하원을 통과한 이 법안이 연말이나 내년 초 상원도 통과할 것으로 보고 대응하는 움직임이다.
◇“미·중 의약품 공급망 분리”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컸던 미국의 제약, 바이오 기업들이 의약품 공급망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 대안을 모색 중이라고 1일 보도했다. 의약품 원료를 중국에서 수입하거나, 의약품 생산을 중국 기업에 위탁하는 식으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제약 바이오 기업들이 중국 측과 ‘헤어질 결심’을 굳혔다는 것이다. 현재 발의된 바이오 보안법은 BGI, MGI, 우시앱텍, 우시바이오로직스 등 중국의 대표 바이오 기업들을 ‘우려 기업’으로 명시하고 규제 대상으로 삼았고, 법안이 확정되면 2031년 말까지 이 기업들과 거래를 끊어야 한다.
이처럼 유예 기간을 두고 있지만 미국 정부 예산 지원을 받거나 원하는 기업들은 미래의 리스크를 고려해 벌써부터 중국 외 공급망을 찾고 있는 것이다. WSJ에 따르면 항바이러스제와 항암제를 개발하는 미국 바이오 기업 ‘비어 바이오테크놀로지’는 중국 우시바이오로직스에 맡기던 치료제 생산을 중단했다. 대신 미국 제약 바이오 회사들과 협력하면서 미국 내 생산에 집중하고 있다. 희소한 신경근육 질환인 ‘폼페병’ 치료제의 원재료 공급과 생산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 기업 ‘애미커스 테라퓨틱스’도 다른 공급 업체를 찾고 있다. 키메라 테라퓨틱스, 인비비드 등 제약사들은 당장 중국 생산은 중단하지 못하고 있지만, 다른 협업은 유럽이나 인도 등 회사로 옮기고 있다.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들도 바이오 보안법 통과를 앞두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다만 중국과 완전한 단절보다는 시장 분리를 염두에 두고 있다. 중국과 서구 공급망을 별도로 구축하는 식이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둘째 규모 의약품 시장인 중국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 중인 중국 내 제약 바이오 수요가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을 염두에 둔 움직임으로 분석된다.
코로나 백신으로 유명한 영국 제약 바이오 기업 아스트라제네카는 아예 미국과 중국 수출용 의약품을 별도의 공급망으로 만들기로 했다고 밝혔다. 미국 시장을 겨냥한 의약품에는 생산을 비롯해 모든 과정에 중국 기업들이 일절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반면 중국에는 신규 생산 시설을 늘려 중국에서 만든 약은 중국에만 팔겠다는 것이다. 독일 머크 역시 별도의 공급망을 구축할 예정이다. 바이오 보안법 리스크는 줄이면서 중국 시장은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중국 우시앱텍에서 비만 치료제 원료를 제조하는 일라이릴리도 바이오 보안법 시행을 대비해 최근 미국, 이탈리아 회사들과 원료 생산 계약을 맺었다.
◇신약 출시 지연 우려도
일각에서는 바이오 보안법이 시행되면 의약품 공급에 차질을 빚고, 치료제 가격도 오를 것이라고 우려한다. 영국 컨설팅 업체 글로벌데이터는 바이오 보안법으로 인해 미국 제약 바이오 기업들의 120가지 의약품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분석했다. 예컨대 얀센의 백혈병 치료제 ‘임브루비카’, GSK의 자궁내막암 치료제 ‘젬펄리’, 낭포성섬유증 치료제 ‘트라이카프타’ 등이 우시바이오로직스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이를 대체할 위탁 생산 회사를 찾지 못하면 공급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미국 제약 업계에서도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미국 바이오텍의 전직 최고경영자는 “바이오 보안법으로 약물 개발 비용이 더 비싸지거나 신약 출시 시기가 늦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국내 제약 업계 관계자는 “미국 내 생산 시설 확대 움직임이 계속되면서, 한국 바이오 기업들이 미국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바이오 보안법이 불러올 공급망 재편 기회를 한국 기업들이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