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박쥐는 이름 그대로 다른 동물의 혈액을 빨아먹고 산다. 혈액은 좋은 먹이가 아니다. 바로 에너지를 제공하는 탄수화물과 지방이 적고 분해하기 힘든 단백질이 많다. 과학자들이 흡혈박쥐가 상대적으로 영양분이 부족한 혈액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을 밝혔다.
캐나다 토론토대 연구진은 흡혈박쥐가 혈액으로부터 얻은 단백질을 즉각 연소해 신체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7일 밝혔다. 연구 결과는 이날 국제 학술지 ‘바이올로지 레터스(Biology Letters)’에 실렸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대부분 달리기처럼 신체 활동을 할 때 탄수화물이나 지방을 태워 에너지를 얻는다. 단백질의 주성분인 아미노산은 먹이가 주는 에너지에서 5~10%만 차지한다. 켄 웰치 토론토대 생물과학부 교수는 “일반적으로 동물에게 아미노산은 최후의 에너지원”이라며 “몸에 남는 것이 별로 없을 때만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혈액 단백질을 주로 섭취하는 흡혈박쥐도 다른 동물과 비슷한지 확인하기 위해 실험했다. 흡혈박쥐 24마리에게 단백질의 구성 성분인 아미노산에 화학 표지를 한 소 혈액을 먹인 뒤 러닝머신 위를 달리게 했다. 박쥐도 포유류여서 날개 형태의 다리로도 달릴 수 있다.
만약 흡혈박쥐가 혈액의 단백질을 바로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면, 달리면서 내쉬는 숨에 화학 표지가 감지된다. 화학 표지가 없다면 탄수화물이나 지방을 태워 에너지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실험 결과 흡혈박쥐의 날숨에서 화학 표지가 확인됐다. 혈액 단백질이 대사 과정을 거쳐 에너지원으로 사용된 것이다.
지금까지 아미노산을 직접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고 확인된 동물은 체체파리나 모기처럼 혈액을 빨아먹는 곤충뿐이었다. 연구진은 “다른 박쥐와 달리 흡혈박쥐는 단백질만으로도 오랜 시간 높은 운동 강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라며 “인간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능력”이라고 했다.
과학자들은 흡혈박쥐와 같은 포유류가 주로 탄수화물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만큼, 흡혈박쥐도 혈액의 단백질을 탄수화물로 바꾼 뒤 에너지로 사용한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로 과학자들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했다.
웰치 교수는 “대부분 동물은 섭취한 영양소를 탄수화물인 당이나 지방으로 바꿔 저장할 수 있지만, 흡혈박쥐는 혈액의 아미노산을 바로 소비한다”며 “영양분을 빠르게 분해하는 탓에 에너지원을 저장하는 능력이 덜 발달했으나, 개체끼리 먹이를 공유하며 혈액이 부족할 때를 대비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마이클 힐러 독일 괴테대 교수는 “흡혈박쥐와 흡혈 곤충이 극한의 식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슷한 메커니즘을 개발했다”며 “흥미로운 수렴진화(收斂進化) 사례”라고 덧붙였다. 수렴진화는 고래와 물고기, 박쥐와 새처럼 전혀 다른 종이 비슷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외형이나 생활사 등이 비슷하게 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제 박쥐와 모기가 수렴진화 관계가 된 셈이다.
참고 자료
Biology Letters(2024), DOI: https://doi.org/10.1098/rsbl.2024.0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