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KAIST 망한 과제 자랑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의 모습./KAIST
청중들에게 자신의 실패담을 설명하고 있는 허도영 학생. 허도영 학생은 이날 최고상인 '최상'을 받았다./KAIST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부 5학년인 전준형 학생은 지난해 의대 증원으로 KAIST 학생들이 대거 자퇴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이미 주변 친구 중 30%가 의대 진학을 위해 자퇴하거나 휴학을 선택하고 있었다. 전준형 학생은 의대 선호 현상이 이공계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확인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2월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을 발표하면서 연구는 큰 난관에 부딪혔다. 처음에는 의대 진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계획했으나 전공의 파업과 의대생들의 대규모 휴학 사태로 어려워졌다. 설문조사 대신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관계자들로부터 ‘인터뷰 자제를 부탁드린다’는 요청이 이어지면서 여러 차례 무산됐다. 어렵게 서른 명 정도를 인터뷰했으나 신뢰할 만한 통계로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연구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지난 13일 저녁 대전 KAIST 본원에서 열린 ‘망한 과제 자랑대회’에서 전준형 학생은 “어떤 연구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요인에 의해 예기치 않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실감했다”며 “이 실패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다른 학생들과 나누고 싶었다”고 밝혔다.

실패의 경험을 공유하는 망한 과제 자랑대회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를 맞았다. 이날 행사에서는 사랑의 상처로 한 학기를 망친 이야기도 소개됐다. 허도영 전기및전자공학부 5학년 학생은 “인생 최고의 학기를 보내던 어느 날, 여자 친구에게 다른 남자 친구가 있었다는 걸 알고 머릿속이 하얘졌다”며 “충격과 실망으로 몸이 상하면서 과제 제출이 늦어져 학점이 떨어졌고, 결국 졸업까지 연기됐다”고 했다.

과제가 무려 219일 밀려 있는 상황이었지만, 허도영 학생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나쁜 습관을 바로잡으면서 인턴십을 새로 시작하고, 점차 학업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결국 모든 시험을 잘 마쳤고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할 기회도 얻었다.

허도영 학생은 “이때의 실패는 이보전진(二步前進)을 위한 일보후퇴(一步後退)였다”며 “누구든 실패를 겪고 있다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극복하길 바란다. 언젠가 그 실패에 감사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KAIST 실패연구소장 조성호 전산학부 교수는 “이 대회는 실패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도전 문화를 확산하려는 취지에서 열렸다”며 “전문가 강연, 뉴스레터도 했지만 수동적 접근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실패를 극복하고 공유하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말아먹은 말아톤’이라는 주제로 불과 열흘 전 마라톤 완주에 실패한 경험담을 공유한 김세헌 전기및전자공학부 3학년 학생은 “처음에는 실패담을 얘기하는 게 어색했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다 보니 편해졌다”며 “실패에 대한 공감을 얻으니 오히려 다음 도전에 대한 의지가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지난해 행사 이후 대회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실패와 도전의 가치가 인식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며 “학생들이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감과 소통을 통해 극복하려는 태도를 조금씩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올해 실패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전히 국내 전반적으로 실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 성인 1500명 중 74.1%가 실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경험했고, 63.3%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전을 포기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기성세대는 실패를 재도전의 기회로 봐 비교적 관대하지만, 젊은 세대일수록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고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경향이 짙었다.

조 교수는 “한국은 단기적 기간에 큰 성공을 하기 위해 앞서간 사례를 보고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방법에 익숙해져 있다”며 “실패는 하지 말아야 하는 걸로 인식되고,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실패에 대한 가치관 교육이 부족했다. 점점 시도하고 도전을 해볼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국민 개개인의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기성세대, MZ세대가 있을 때 살아온 환경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조 교수는 “기성세대는 나라가 어려웠다가 급속하게 성장하는 걸 경험하면서 도전하는 것에 대해 익숙해졌지만, 비교적 젊은 친구들은 풍요로운 상황에서 자라면서 실패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실패연구소는 앞으로도 실패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도전 문화를 장려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할 계획이다. 다음에는 타 대학이나 공공기관과 협력해 실패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목표다. 조 교수는 “실패와 성공은 항상 같이 다닌다”며 “실패를 적게 했다면 큰 성공을 기대해선 안 된다. 큰 성공을 위해서는 실패를 많이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