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군인 안톤 수슈코(40)는 지난 9월 왼쪽 허벅지에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의료진이 항생제를 투여했지만, 그의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았다. 그가 감염된 세균(박테리아)이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수퍼 박테리아’였기 때문이다. 감염이 잡히는 데만 3주 넘게 걸렸다. 이 병원의 외과장인 세르기 코술니코프는 AFP에 “부상을 입은 군인의 50%가 치료 전부터 항생제에 내성을 보인다”며 “항생제를 쓰려고 할수록 내성이 더 세지는 상황”이라고 했다.
유럽과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수퍼 박테리아가 전장에서 대대적으로 출현하고 있다. 항생제는 세균을 죽이거나 증식을 억제하는 약이다. 1928년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이 발견되면서 세균 감염으로 인한 사망률은 급감했다. 하지만 지난 100년간 항생제가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면서 항생제로도 죽지 않는 세균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면 부상 치료를 위해 항생제가 대량으로 사용되고, 수퍼 박테리아가 대거 나타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수퍼 박테리아 키우는 전쟁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27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3년째에 접어들면서, 우크라이나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항생제에도 견딜 수 있는 수퍼 박테리아의 번식지가 됐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박테리아는 ‘클렙시엘라 폐렴균’이다. 항생제 내성으로 인해 세계에서 매년 약 500만명이 사망하는데, 그중 약 20%가 이 폐렴균이 사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스웨덴 룬드대 연구팀이 25일 국제 학술지 ‘감염 저널’에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클렙시엘라 폐렴균 중 4분의 1은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항생제에 내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를 이끈 크리스티안 리스벡 교수는 “이 박테리아로 인한 감염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으로는 치료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며 “환자들이 제대로 격리되고 치료받지 못하는 한, 감염 확산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가자지구 역시 수퍼 박테리아의 온상으로 지적되고 있다. 포도상구균을 포함한 다양한 항생제 내성 박테리아들이 병원과 상하수 등에서 발견된 것이다.
수퍼 박테리아가 생겨나는 가장 큰 원인은 항생제 오남용이다. 세균들이 지속적으로 항생제에 노출되면서 내성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것이다. 특히 전쟁은 수퍼 박테리아가 번식되기에 최적의 환경으로 꼽힌다. 전장에서는 병사들이 자주 부상을 입는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세균 감염을 막겠다며 적절한 검사 없이 항생제를 남발하다 보니 수퍼 박테리아가 번식하게 된다. 실제로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아시네토박터 바우마니’라는 수퍼 박테리아가 많이 검출됐다. 이 박테리아는 2003년에는 12%가 주요 항생제에 내성이 있었지만, 변이를 거듭해 2015년에는 내성률이 99.2%로 급증했다.
◇글로벌 보건 위기 우려
항생제 내성으로 인한 사망은 이미 세계적으로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 2022년 국제 학술지 랜싯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2019년 항생제 내성으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사망한 사람은 495만명에 달한다. 폐암(204만명)이나 치매(162만명)보다 더 치명적인 셈이다.
전쟁에서 자라난 수퍼 박테리아들이 외부로 퍼져나가면 항생제를 무력화시키고 글로벌 보건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도망치고, 부상당한 군인과 민간인이 긴급 의료를 위해 대피하면서 수퍼 박테리아는 국경 너머로 퍼지고 있다”며 “최소 6개 유럽 국가와 일본에서 발견됐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