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침 뱉는 코브라'는 독을 먼 거리까지 뱉을 수 있다./퀸즐랜드대

뱀은 오래전부터 신화와 전설에서 강렬한 상징으로 자리 잡아왔다. 고대에는 재생과 지혜를 상징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신화와 동화에서 뱀은 죽음과 고통의 상징으로 자주 묘사되며, 많은 사람에게 경계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매년 약 6만3000명이 뱀독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는 통계는 뱀의 치명적인 위협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뱀독이 단순한 공포의 상징에 그치는 건 아니다. 뱀독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위협이면서도, 그 복잡한 화학 성분이 현대 과학과 의학 발전의 중요한 열쇠로 주목받고 있다. 뱀독 연구는 인간 신체의 복잡한 생리적 작용을 이해하고,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있어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정맥 주사에서 경구 치료제로…뱀독 치료의 발전

뱀독은 신경 마비, 조직 손상, 출혈 등 다양한 증상을 유발하는 복잡한 화학 물질로 이뤄져 있다. 뱀의 종마다 독의 성분이 다르며, 독소는 주로 신경계를 공격하거나 혈액 응고를 방해하고 조직을 파괴하는 등 치명적인 작용을 한다.

과거에는 뱀독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항독소 치료법이 개발됐다. 약화된 뱀독을 동물에게 주입해 생성된 항체를 추출한 뒤, 이를 환자에게 투여하는 방식으로 생명을 구했다.

그러나 항독소 치료는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우선 특정 뱀독에만 효과가 있고, 뱀 물림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는 시골 지역에서는 항독소를 구하기 어렵다. 또 정맥 주사가 필요해 응급 상황에서 즉각적인 치료가 어렵고,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연구자들은 새로운 방식의 치료법을 모색하고 있다.

먼저 기존 약물을 재활용하는 방식이 뱀독 치료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심혈관 치료제로 개발됐던 ‘바레스플라딥(varespladib)’이 있다. 이 약물은 뱀독의 95%에서 발견되는 주요 독소인 ‘sPLA2′ 효소를 억제해 뱀독의 독성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다. 특히 바레스플라딥은 경구 약물로, 응급 상황에서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

중금속 중독 치료제로 사용되던 약물인 ‘유니티올’ 역시 뱀독 치료제로 주목받고 있다. 유니티올은 중금속 이온과 결합해 체외로 배출되도록 돕는 약물로, 뱀독의 주요 성분인 메탈로프로테이나제 효소의 금속 이온을 중화시켜 독성을 낮춘다. 이 같은 약물들은 항독소 치료제가 도달할 수 없는 조직까지 침투할 수 있어, 기존 치료법의 한계를 극복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동물과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 시험이 진행 중이다.

◇새로운 항체와 AI, 뱀독 치료 위한 신기술

전통적인 항독소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항체 기반 치료법이 연구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95Mat5′라는 항체는 코브라와 맘바 독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며, 기존 항독소보다 알레르기 반응 위험이 낮다. 생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생쥐에게 뱀독을 투여한 뒤 10~20분 후 해당 항체를 투여하자, 쥐가 24시간 이상 생존했다. 반면 항체를 투여받지 않은 쥐는 3시간 이내에 사망했다.

라마와 알파카에서 추출한 나노 항체 역시 주목받고 있다. 나노 항체는 크기가 작아 뱀독의 특정 성분에 더 빠르고 정확하게 결합할 수 있고, 생산 비용이 낮으면서 안정성이 높다. 이를 이용해 18종의 맘바와 코브라 독을 라마와 알파카에 주입한 뒤, 동물의 혈액에서 항체를 생성하는 백혈구의 DNA를 추출한다. 이후 DNA를 분석해 뱀독에 가장 효과적인 나노 항체를 선별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올해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베이커 미국 워싱턴대 교수 연구진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뱀독에 결합할 수 있는 새로운 단백질을 설계하기도 했다. 연구진이 설계한 단백질을 생쥐에 주입한 결과, 독소에 대해 높은 보호 효과를 보이는 것이 확인됐다.

◇뱀독에서 영감 받은 의약품들

뱀독은 치료제 개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뱀독은 효소와 단백질, 펩타이드와 같은 생체 활성 물질들이 합쳐져 신체의 여러 시스템에 치명적으로 작용하도록 설계됐다. 타깃 물질을 빠르고 정확하게 공격하는 특성 덕분에 약물 개발하는 연구자들에게 영감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혈압 치료제 캡토프릴(Captopril)이다. 1980년대에는 브라질 살무사의 독에서 발견된 특정 펩타이드는 혈압을 조절하는 효소의 작용을 억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 펩타이드는 혈관을 조여 혈압을 조절하는 ‘안지오텐신 전환 효소(ACE)’의 과도한 작용을 억제했다. 이 효소가 막히면 혈관이 이완되고 혈압이 낮아진다.

연구자들은 뱀독에서 발견된 천연 펩타이드의 작용을 모방하면서도 인간에게 더 안전하고 효과적이도록 설계해 캡토프릴을 만들었다. 이를 기반으로 개발된 캡토프릴은 현재 심부전과 고혈압 치료에 사용되며,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있다.

이를 두고 맨데 홀포드 뉴욕 헌터 칼리지와 뉴욕시립대 대학원 교수는 “독은 여러 시스템에 동시에 작용하는 클러스터 폭탄과 같다”며 “이는 신약 개발에서 여러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참고 자료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4-03818-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