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 거리 곳곳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좀비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소위 ‘마약 좀비’라 불리는 이들은 의사로부터 처방받은 진통제 펜타닐을 투약하다 약물 중독자가 됐다. 강한 중독성이 있는 마약성 진통제가 오남용, 불법 유통되면서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여러 대형 제약사가 이런 마약성 진통제의 심각한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비(非)마약성 진통제 개발에 도전했다가 거듭 실패했는데, 국내 기업 비보존 제약이 개발에 성공했다. 바로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지난달 품목 허가한 38호 국산 신약 ‘어나프라 주’다.
어나프라 주(성분명 오피란제린)는 수술 후 중등도 이상의 급성 통증 조절을 위해 사용하는 주사제로, 기존 마약성 또는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와는 다른 원리의 새로운 치료제다. 수술 후 통증, 사고에 의한 통증, 3도 이상 화상에 의한 통증, 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통증으로 느끼지 않아야 할 자극을 통증으로 느끼는 신경병성 통증, 암 환자들이 고통을 느끼는 암 통증이 중등도 이상의 통증에 해당한다.
기존에는 중등도 이상의 통증에 쓸 수 있는 약은 마약성 진통제(오피오이드 계열)뿐이었다. 하지만 강한 중독성과 내성이 부작용이다. 내성이 생기면 기존 용량으로 치료 효과를 못 보니 치료 한계가 있고, 약물 용량을 늘려 과다 투여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두현 비보존그룹 회장은 지난 7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비보존 사무실에서 조선비즈와 만나 “어나프라 주(오피란제린)는 글로벌 최초의 다중 수용체 표적 비마약성 진통제이자 중등도 이상의 심한 통증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글로벌 최초의 비마약성 진통제”라며 “세계 시장에서 개발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비보존그룹은 이 회장이 2008년 설립한 통증·중추신경계 질환 신약개발 바이오 기업이다. 2020년 9월 계열사 비보존헬스케어를 통해 현 비보존제약, 옛 이니스트바이오제약을 인수했다. 이니스트바이오제약은 1938년 경성약품으로 시작된 국내 제약사로, GMP(우수 의약품의 제조관리 기준) 인증을 획득한 공장을 보유하고 있어, 의약품 생산 공급을 염두에 두고 사들였다.
이 회장은 고려대 심리학과 생물심리학 박사 과정을 거쳐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미국 암젠, 존슨앤드존슨, 일라이 릴리 등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진통제 개발에 참여했다. 그는 당시 대형 제약사들의 비마약성 진통제 개발에 실패한 원인이 단일 수용체에 작용하는 약물 개발에만 초점을 둔 데 있다고 판단했다. 쉽게 말해 통증이 발생하는 원리는 복합적인데, 하나만 겨냥한 약물로는 통증을 잡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이에 비보존을 설립해 다중 수용체를 표적으로 하는 비마약성 진통제 개발에 도전했다. 어나프라 주는 통증 제어 효과는 기존 마약성 진통제와 대등한 수준이나 중독, 내성 등의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회사는 구토, 오심 이외에는 거의 부작용이 없다고 했다.
이 회장은 “올해 국내에 어나프라 주가 출시되면 회사 매출액 목표 1151억원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2025년은 비보존제약이 신약을 판매하는 중견 제약사로 발돋움하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종합병원 영업 경험이 많은 보령과 어나프라 주 유통·판매 역할을 분담할 계획이다. 이 회장은 “보령과 협업으로 어나프라 주의 보급이 월등히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전 세계 비마약성 진통제 시장은 2030년에 약 100조원 규모가 될 전망이다. 비보존제약은 어나프라 주의 후속으로 비마약성 진통제를 먹는 약으로도 개발 중이다.
회사는 VVZ-2471을 국내에서 먹는 통증 치료제로, 미국에서 마약 중독 치료제로 각각 개발할 예정이다. 개발에 성공하면 세계 진통제와 약물 중독 치료제 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회장은 “VVZ-2471은 현재 임상 2상을 진행 중”이라며 “이는 마약 중독과 같은 물질 남용에 효과가 있어 현재 미국 중독 전문가들과 합심해 임상 개발을 원활히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이 회장과의 일문일답.
–회사를 세워 비마약성 진통제 개발에 뛰어든 계기는.
“미국 제약사 근무 당시 마약성 진통제와 소염진통제의 부작용 문제가 대두되면서, 진통 효과는 마약성 진통제와 대등하면서 중독성이나 위장관 출혈 등의 부작용이 없는 새로운 진통제 개발이 절실했다. 당시 유전 공학과 분자 생물학의 발전으로 통증과 관련된 수많은 유전자와 수용체가 발견됐으나, 많은 제약사가 신약 개발에 실패했다. 저도 약 10년간 많은 연구를 주도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다 중대한 실패 원인을 파악했다. 당시 신약 개발 패러다임은 단일 수용체에 작용하는 약물 개발이었다. 하지만 통증은 단일 기전이 아닌 다중 기전이므로 단일 수용체에만 작용하는 약물로는 제어가 어렵다. 이에 다중 수용체에 동시에 작용하는 약물을 개발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어떻게 하면 다중 수용체에 작용하는 약물을 개발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전기생리학적 방법을 이용해 후보물질을 빠르게 스크리닝할 수 있는 방법론을 고안했다. 당시 정경운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화학과 교수에 이런 아이디어를 제안했는데, 정 교수가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며 창업을 권유했다. 이에 2008년 귀국해 회사 비보존을 설립했다. 정 교수는 사업 초창기 3년 동안 약 30억원의 자금을 모집해 줬다.”
–오피란제린을 어떻게 발굴했나.
“2008년 비보존을 설립해 약 6개월에 걸쳐 전기생리학적 스크리닝 방법을 구축했다. 서울대학교 화학과 이은, 이철범 교수와 협업해 글라이신 수송체 2형에 작용하는 물질들을 합성하고 스크리닝을 시작했다. 글라이신 수송체 2형만 작용해서는 원하는 효능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작용 물질을 지속적으로 합성하면서 가장 우수한 효능을 갖는 물질을 발굴하는 연구를 이어갔다. 이를 통해 약 1년 만에 오피란제린을 확보했다. 이는 글라이신 수송체 2형뿐 아니라 5HT2a 수용체에도 작용하는 물질이다. 각각의 물질은 통증에 전혀 효과가 없는데 그 두 물질을 함께 투여하면 진통 효과가 매우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을 동물실험에서 확인해, 오피란제린의 개발을 결정했다.”
–정부의 지원도 있었다고.
“그렇다. 2011년 보건복지부 신약 개발 지원사업 비임상부문에 선정돼 비임상개발이 시작됐다. 이어 2013년에는 임상 1상 부문에 선정돼 임상 1상까지는 일사천리로 개발이 진행됐다. 이후 2016년 글로벌 임상 2상 과제에 선정돼 미국에서 임상개발 기반을 마련했다. 총 78억원 규모의 국가 지원을 받았다.”
–개발부터 허가까지 자금 투입 규모는.
“정부 지원금을 포함해 약 780억원이 투입됐다. 막대한 규모인데, 그 중 약 80%는 글로벌 개발을 위한 투자금이다. 임상 2상 진입 단계까지 약 200억원이 투입됐다. 미국에서의 임상 개발 단계에 약 500억원이 투입됐으나 2020년 초에 발생한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미국에서 차질이 생겼다. 이에 재빨리 한국에서 임상 3상을 신청해 2021년 7월에 임상 3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임상 3상 수행은 비보존제약이 전용 실시권을 받아 진행했고 지금까지 80억여원이 투자됐다.”
–어려움은 없었나.
“자금 조달 어려움이 컸다. 회사 설립 당시 국내 시장에 바이오 투자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초기 3~4년 동안 자금 압박이 매우 심했다. 동고동락한 연구원들을 모두 내보내야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건복지부 신약 개발 지원사업에 연달아 선정되면서 투자자들이 생겼고 임상 개발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었다. 2017년엔 주주배정 유상증자를 통해 1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두 번째 어려움은 코로나19 대유행 시기로, 미국에서 진행하던 임상 3상이 두 번이나 중단되는 사태를 겪었다. 큰 비용이 소모됐고 무엇보다도 시간적인 지연이 컸다. 한국에서 임상 3상을 진행하긴 했지만, 미국에서는 전혀 진척이 없었는데 자금 소진이 많았다.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 경제 여건이 나빠져 투자 여건이 악화해 어려움이 있었다.”
–어려움 끝에 신약 상용화에 성공했다. 미국을 비롯한 해외 시장 진출 계획은.
“미국은 비보존이 자금을 확보한 후 임상시험을 진행을 할 계획이다. 시간적으로는 최소 3년이 걸릴 것으로 본다. 미국 이외의 시장은 비보존제약이 적극적으로 수출· 기술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 국내에서 품목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수출·기술이전 논의도 빨라질 것이다.”
–비마약성 진통제를 먹는 약으로도 개발 중이라고.
“VVZ-2471을 경구제로 개발 중이다. 어나프라 주는 주사제이기 때문에 장기 투여 시 불편함이 있는데 경구제는 편의성을 높일 수 있다. VVZ-2471은 현재 임상 2상 진행 중이다. 연내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마약 중독과 같은 물질 남용에 효과가 있어 현재 미국의 중독 전문가들과 합심해 미국 국립보건원(NIH) 산하 미국국립약물남용연구소(NIDA)에 연구비를 신청해 놓은 상태다. 1차 평가 결과에서 매우 좋은 점수를 받았다. 이에 마약 중독 치료제로서의 임상 개발도 원활히 진행될 것으로 본다.”
–VVZ-2471의 치료 원리는 어나프라 주와 같나.
“거의 같다. 어나프라 주나 VVZ-2471은 말초에서 발생한 통증 신호가 중추신경계로 전달되는 원리를 방해하는 효과와 중추신경계가 통증에 대한 민감도를 높이는 원리를 방해하는 효과가 시너지를 일으켜 탁월한 진통 효과를 낸다. 말초에서 중추신경계로 통증 신호를 전달하는 게 ‘글라이신 수송체 2형’과 ‘글루타메이트 수용체 5형’인데 어나프라 주는 글라이신 수송체 2형을, VVZ-2471은 글루타메이트 수용체 5형을 방해한다. 중추신경계의 통증 민감도는 세로토닌 수용체 2a형에 의해 조절되는데, 어나프라 주와 VVZ-2471 모두 세로토닌 수용체 2형을 방해한다.”
–비보존 그룹이 개발 중인 다른 R&D 파이프라인은.
“어나프라 주, VVZ-2471에 이은 세 번째 파이프라인은 VVZ-3416이다. 이는 3가지 타깃에 작용하는 물질이다. 하나는 많은 글로벌 제약사가 퇴행성 뇌 질환 치료제로 개발하려던 타깃이고, 또 하나는 파킨슨병 치료제로 사용하고 있는 타깃, 다른 하나는 세포 또는 신경세포의 노화를 늦추는 역할을 하는 혁신적 타깃이다. 여러 실험을 통해 파킨슨병, 노인성 치매에 효과가 있다는 결과가 도출됐다. 특히 노인성 치매에 대한 동물모델 실험에서 병의 진행을 100% 멈추는 매우 고무적인 결과를 보였다. 현재 비임상 독성 연구는 마무리 단계로, 연내 임상 1상에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조현병 치료제 후보물질은 연내 비임상 연구를 거쳐 내년 임상 1상에 진입할 계획이다. 이 외 동맥경화증 치료제 후보 물질은 아직 초기 연구 단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