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양자컴퓨터의 상용화에 2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으면서 전 세계 양자컴퓨터 관련 주가가 급락했다. 황 CEO가 내놓은 20년은 과학기술계가 예상한 양자컴퓨터의 상용화 시기인 5~10년보다 훨씬 늦은 시점이다.
젠슨 황이 양자컴퓨터에 대해 보수적인 전망을 했지만, 정작 엔비디아는 양자컴퓨터 인력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엔비디아는 14일 기준으로 양자컴퓨터 전문 인력 채용 공고를 9건 올려 뒀다. 양자컴퓨터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설계 전문가는 물론 양자오류정정과 응용 분야에서 전문가를 찾고 있다. 이들은 엔비디아가 추진하는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 연구에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는 기존 컴퓨터 기술을 의미하는 고전컴퓨터와 양자컴퓨터를 결합한 형태를 말한다. 양자컴퓨터는 궁극적으로 일부 연산에서 고전컴퓨터를 뛰어넘는 성능을 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다만 연산 단위인 ‘큐비트(Qubit)’의 수가 충분하지 않고, 양자 연산의 근본적인 문제인 ‘양자 오류(Quantum Error)’는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양자기술 산업계는 이 같은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고전컴퓨터의 안정성과 결합한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 기술에 주목하고 있다.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의 작동 방식은 다양하다. 고전컴퓨터가 양자 제어와 연산의 결과 분석, 후처리를 담당하고, 양자컴퓨터가 복잡한 연산을 수행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는 물류와 교통 경로를 계산하거나 신약 소재 개발, 금융 분야에서 슈퍼컴퓨터보다 뛰어난 연산 결과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에 양자컴퓨터를 적용한 ‘양자-고전 강화학습’ 기술도 연구 중이다.
정윤채 한미양자기술협력센터장은 “슈퍼컴퓨터 기업들이 양자컴퓨터 도입을 고려하고 있거나 이미 시범사업을 시작했다”며 “엔비디아는 여기에 소프트트웨어를 공급하는 주요 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엔비디아는 고전컴퓨터와 양자컴퓨터의 호환성을 높이는 컴파일러인 ‘nvq++’를 개발하고 있다. 고전컴퓨터와 양자컴퓨터가 소통할 수 있는 ‘양자 중간 표현(QIR)’을 이용해 두 기술을 연동하는 일종의 개발 도구다. 이 외에도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에 쓰일 슈퍼컴퓨터용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양자컴퓨터 개발 도구 등 다양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최근 ‘기후 및 날씨 제품 관리 책임자’를 채용하면서 양자컴퓨터를 즉각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기도 했다. 엔비디아가 개발 중인 기후 모델 ‘어스-2’에 양자컴퓨터를 결합해 정확도를 높이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에 주목하는 기업은 엔비디아뿐이 아니다. 황 CEO의 발언으로 주가가 30% 이상 떨어진 양자컴퓨터 기업 아이온큐는 이미 엔비디아와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 분야에서 협력을 하고 있다. 아이온큐의 양자컴퓨터와 엔비디아의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 플랫폼(기반 기술) ‘쿠다-큐’를 결합하는 방식이다. 아이온큐는 지난해 11월 슈퍼컴퓨터 학술대회인 ‘SC24’에서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를 공개시연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체 개발한 양자컴퓨터 클라우드 ‘애저 퀀텀(Azure Quantum)’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를 선보였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는 미국의 양자컴퓨터 기업 아톰 컴퓨팅의 ‘H2’를 기반으로 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해 11월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로 촉매 반응 과정의 에너지 상태를 추정해내면서 산업 분야 활용 가능성을 확인했다.
정부가 양자컴퓨터 개발을 주도하는 유럽연합(EU)도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에 주목하고 있다. EU는 공동 슈퍼컴퓨터 구축 사업인 ‘유로HPC’를 통해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정원 한EU양자기술협력센터장은 “이번 프로젝트에는 유럽 6개국이 참여해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와 클라우드 서비스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윤채 센터장은 “현재 양자컴퓨터 산업 생태계는 누가 먼저 실용적인 응용 분야를 찾는지가 관건”이라며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터는 양자컴퓨터의 불확실성은 최소화하면서 빠르게 응용 분야를 찾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