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부산 사하구 A 섬유 염색공장 출입문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굵은 거미줄이 쳐진 설비들엔 켜켜이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35년 된 이 공장은 2년 전만 해도 직원 30여 명이 기계 25대를 돌리면서 하루에 원단 2만㎏을 염색했다. 하지만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해외 저가 공세 탓에 경영난을 겪다가 코로나가 닥치자 결국 지난 8월 공장 문을 닫았다. 한때 공장장으로 일했던 송모(73)씨는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나만 폐공장 경비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향하고, 부동산 가격은 치솟고 있지만 우리 중소기업은 인건비·법인세 등 비용 증가, 내수와 수출 부진, 자금난에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까지 ‘4중고(重苦)’ 복합 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 경제에서 기업수 99.9%(663만9000개), 고용 83%(1710만4000명), 기업 매출의 48.5%(2662조9000억원)를 담당하는 ’9983′ 중소기업의 심각한 위기인 것이다.
중소기업중앙회와 본지가 지난달 23~30일 제조·서비스업 중소기업 630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내년 경제 상황에 대해 ‘올해와 비슷하거나 더 나빠질 것’이라는 응답이 89.2%였고, ‘더 좋아질 것’이란 응답은 10.8%에 그쳤다. 내년 경제 상황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중소기업을 살리지 못한다면 고용 문제 해결은 물론 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 반등도 요원하다는 지적이다.
이번 설문조사는 18일 본지와 중기중앙회가 공동 주최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중소기업 정책 포럼’에 앞서 진행됐다. 포럼에서는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기조 강연과 특별 좌담회, 김종호 삼성전자 스마트공장지원센터장의 특별강연과 주요국의 중소기업 지원 정책에 관한 토론회가 열린다.
코로나, 주52시간, 신용강등, 빚폭탄… 中企들 “앞이 안보인다”
지난 10일 섬유공장 52곳이 몰려 있는 24만㎡(7만2000평) 부지 부산 신평장림산업단지에는 공장 문만 열었지 일감이 없어 개점휴업 상태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공단 평균 가동률은 50% 이하로 떨어졌고, 아예 폐업했거나 임시 휴업한 곳도 10곳이 넘는다. 이곳의 B 섬유회사는 코로나로 매출이 반 토막 났다. 기계 40여대 중 10대만 가동하고 있었다. 김병수 부산경남패션칼라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은 “문 닫는 공장이 늘고, 젊은이들이 떠나면서 유령 공단으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경기 안산 반월공단에 있는 자동차 부품업체 C사는 올해 직원 50명 중 30명을 내보냈다. 수출이 주력인데 코로나 탓에 외국 바이어가 들어오지 못하면서 매출이 70% 줄었기 때문이다. 박모 대표는 “중국 기업은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50%나 싸게 파는데 우린 감당이 안 된다”면서 “앞이 안 보이니 차라리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공장 가동률 떨어지고, 빚·파산 급증
내수 위축과 수출 감소로 국내 중소기업의 공장 가동률은 떨어졌다. 중소 제조업의 평균 가동률은 지난해 12월 72.9%에서 올해 9월 68.9%까지 4%포인트 감소했다. 지난 5월 66.2%로 2009년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최저치를 기록한 이후 회복도 더디다. 9월 경기전망지수(SBHI·중소기업건강도지수)는 67.9에 그치고 있다. 이 지수가 100보다 낮으면 기업들이 경기 전망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미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수도권의 특수강업체 D사는 요즘 한 달에 16일만 공장을 돌린다. 코로나로 일감이 30% 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원 월급은 꼬박꼬박 챙겨줘야 한다. D사 이모 대표는 “최저임금 급등하면서 월급이며 상여금이며 퇴직금까지 인건비가 제일 무섭다”고 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안 오니 직원 평균 나이가 48세다. 놀아도 고용 보험에서 월 180만원씩 주니 누가 일하려 하겠느냐”고 했다. 9월 기준으로 중소기업 근로자 71만2000여명은 일시 휴직한 상태다. 이 중 절반이 사업 부진이나 조업 중단이 이유다.
지난 2분기 중소 제조업의 성장성·수익성·안정성을 보여주는 3대 지표는 모두 악화했다. 매출증감률은 작년 2분기 -0.5%에서 올 2분기엔 -7.3%로 나빠졌다. 작년 2분기 1000원어치 팔아 67원 남기던 게 올해는 55원으로 줄었다. 부채비율은 98.2%에서 101.6%로 높아졌다. 중소기업 은행 대출 잔액은 790조원(9월말)으로 1년 사이 81조원이 급증했다. 빚을 갚지 못해 파산을 신청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법원통계월보에 따르면, 올해 1~9월 전국 법원에 접수된 법인 파산 신청은 815건으로,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13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미래전략연구단장은 “코로나 때문에 성장은 정체되고 자금 사정은 악화해 대출만 늘어나는 기업이 많다”며 “결국 대출 갚을 길이 없어 기업이 파산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주 52시간제, 대출 리스크 온다
중소기업계는 아직 코로나 극복도 요원한 상태지만 내년 시행되는 주 52시간제로 고민에 빠졌다. 경상도에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강모 대표는 내년 1월부터 적용되는 주 52시간제를 피해 분사(分社)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직원 200명을 공정 단위로 쪼개 주 52시간 적용을 받지 않는 ’50인 미만 소사업장'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강 대표는 “코로나에도 주 52시간제를 한다니 편법으로라도 피해갈 수밖에 없지 않겠나. 주위에서도 분사를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기중앙회 설문조사에 따르면, 주 52시간을 넘겨 근무하는 50~300인 중기의 84%는 “아직 도입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답했다.
내년 중기의 ‘대출 폭탄’도 우려된다. 당장 내년 3월 이후 진행될 신용 등급 평가에서 코로나로 실적이 악화한 기업들의 신용 등급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은행권에서 대출 금리를 높이거나 최악의 경우 자금을 회수하려 들면서 줄도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철수 창원상의회장은 “코로나 피해 때문에 실적이 떨어진 기업은 예외적으로 신용등급 하락을 유보해준다든지 하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