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에 있는 로켓 개발 스타트업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이하 페리지)는 평범한 오피스 건물에 있다. 지난달 찾은 이곳엔 카페인 음료가 상자째 쌓여 있었고, 로켓 부품과 공구가 어지럽게 놓인 책상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코딩하는 직원도 있었다. 로켓 연구소라기보다는 대학 공대 실습실 같은 분위기다. 실제 대학을 갓 졸업한 20~30대 직원들이 대부분이지만, 페리지는 지난해 12월 제주도에서 국내 스타트업 중 처음으로 액체 로켓 발사 실험에 성공했다. 2016년 KAIST 항공우주공학과 1학년 때 친구 넷과 함께 회사를 창업한 신동윤(25) 대표는 “우리는 로켓 설계부터 주요 부품, 소프트웨어까지 직접 만드는 ‘딥테크’ 스타트업”이라며 “내년 초소형 우주로켓 발사에 성공하고, 소형 위성을 궤도로 올려주는 서비스를 개시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특정 기술을 깊게 파고드는 ‘딥테크(Deep Tech)’ 스타트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기존 한국 스타트업이 배달의민족·쿠팡 등 020(온·오프라인 연계) 서비스를 중심으로 시작해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이 됐다면, 딥테크 스타트업들은 혁신 기술을 기반으로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등 제품과 서비스를 만든다. 딥테크 스타트업은 2010년대 후반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최근 한국에서도 자율주행·반도체·로켓·AI(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딥테크 스타트업이 나타나 세계 무대에 도전장을 내고 있다.
◇뾰족한 기술로 뾰족한 시장에 도전한다
딥테크 스타트업들은 ‘뾰족한 시장(니치마켓)을 타깃으로 한 뾰족한 기술’을 앞세운다.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개발 스타트업 스트라드비젼은 ‘25%의 시장’을 노린다. 이 회사는 차량의 카메라·라이다(물체까지 거리를 측정하고 이미지화하는 기술)를 통해 입력된 영상에서 차·사람·도로신호 등을 구별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ADAS(첨단운전자보조기술)와 자율주행의 핵심 기술로, 글로벌 주요 완성차에 이 회사 소프트웨어가 탑재돼 있다. 창업자 김준환 대표는 “저가·저성능 차량용 반도체를 쓰는 자율주행차에서도 구동하게 설계한 것이 차별점”이라며 “인텔 자회사 모빌아이가 75%를 점유하지만, 상대적으로 저가 제품을 쓰는 차량 시장을 노렸다”고 말했다.
창업 2년 차인 팹리스(반도체 설계) 스타트업 리벨리온은 금융기관들의 초단타매매(HFT, High Frequency Trading)를 위한 주문형 반도체(ASIC)를 설계한다. 현재 JP모건 등 월스트리트 금융사들과 협업하면서 제품을 테스트 중이다. MIT(매사추세츠공대) 박사 출신으로 인텔과 스페이스X를 거친 박성현 창업자는 “0.000001초 단위로 매수와 매도를 반복하는 초단타매매 연산을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하도록 설계한 반도체”라고 설명했다. 네이버 검색엔진(첫눈)을 개발한 남세동 대표가 창업한 AI개발 스타트업 보이저엑스도 유튜브 자막 자동 생성 AI, 스마트폰 스캐너, 손글씨를 디지털 폰트로 제작하는 AI 등 작지만 성공 가능성이 높은 AI를 개발하고 있다.
◇기술의 변곡점, 돈도 몰린다
딥테크 스타트업 창업이 활발해지고, 시장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한 이유는 기술의 빠른 발전이 변곡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과거 실험실에 머물렀던 기술이 이제는 시장성도 갖추게 된 것이다. 예컨대 페리지의 길이 8.8m 초소형 로켓(누리호의 6분의 1 수준) 개발은 인공위성 소형화가 이뤄지면서 가능해졌다. 무게 1000㎏이 훌쩍 넘었던 인공위성은 100㎏ 미만 제품이 나왔고, 소형 위성을 대신 쏴주는 해외 스타트업도 생겨났다. 리벨리온의 반도체도 대만 TSMC 같은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이 위탁생산을 해줄 정도로 반도체 산업이 성숙해진 것이다.
자연스럽게 시장의 돈도 딥테크 기업에 쏠린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기·기계·제조·화학·소재 등 딥테크 스타트업에 1조원 넘는 자금이 투자됐다. 분야마다 30~88% 증가했다. 기술창업 액셀러레이터 블루포인트파트너스의 이용관 대표는 “독보적인 기술은 당장 매출이 적거나 없더라도, 미래에 훨씬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투자업계에도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딥테크(Deep Tech)
공학, 과학 연구·개발을 기반으로 첨단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파는 스타트업을 일컫는 용어. 미 벤처투자업계에서 만들어진 용어로, 특정 기술에 대한 특허나 독보적인 성과를 갖고 있어 일반적인 서비스 스타트업처럼 모방이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