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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정말 좋아하던 블로거였고, 또 서브컬쳐를 사랑하는 “오타쿠”들에게는 롤모델로 여겨지는 사람이었다. 워낙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보니 무작정 보내온 메일에 끌려 나도 무조건 만나러 달려나갔다. 레진님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레진님, 그러니까 한희성 대표님은 만나자마자 대뜸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 만화 매체가 몇개나 될까요?” “글쎄요… 네이버와 다음, 두개?” “일본은 1,000개 정도 있습니다. 나머지 998개는 제가 만들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만드는 회사에 투자를 안할 수 있나! 나는 호기롭게 단 한명 밖에 없는 회사, 레진엔터테인먼트의 첫번째 투자자가 되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문제는 한 대표님은 대한민국 대표선수급 오타쿠였지만 회사 경험도, 사업 경험도 없는 분이셨다는 거다. 그 때는 퓨처플레이를 만들기 전이라서 그리고 엔젤투자자로서도 경험이 없어서 덜컥 큰 돈을 투자했지만, 아마 지금의 나라면, 퓨처플레이라면 “어떻게 사업계획서도 없는 회사에 투자하느냐”며 주저했을 거다.

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좋은 사람들을 소개해 주는 수 밖에. 그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이성업님이었다. KAIST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선생과 학생 사이로 만난 그는, 무척이나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걸 물어봤던 기억은 없는데 왠지 웹툰 같은 걸 좋아할 것도 같았고.

“… 성업, 요즘 어때? 맥주나 한잔 할까?” “아, 저 요새 힘들어요. 술 좀 사주세요!”

그렇게 동네 호프집에서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IT 대기업에 다니던 그는 사내 정치로 지친다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이 때를 놓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업 노틸러스 대표.

“왜 그렇게 살아? 회사도 임원도 네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어. 성업은 창의적인 사람이잖아. 어차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정글에서 살 수 밖에 없어. 정글에 나와서 스스로가 원하는 걸 만들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을 한번 배워봐. 내가 도와줄께.”

성업님의 눈이 슬며시 커졌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 기세를 몰아서…

“혹시 만화나 웹툰 이런거 좋아해?” “아뇨 뭐 딱히. 그런데 그런건 왜 물어보세요?”

의외로 심드렁한 답에 마음 한구석이 덜컥했지만 그래, 맘 먹었으니 끝까지 밀어붙이자, 는 마음으로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니 내가 요즘 투자하려는 회사… 뭐 한명이니까 아직 회사라고 하긴 좀 그렇고. 거기서 정부과제 제안서를 하나 써야하는데 대표님이 혼자 하기 어려워 하시더라고. 이번 주말에 성업이 같이 도와드림 어때? 혹시 아나 블로거 레진님이라고?”

성업님도 나와 같이 레진님의 얼굴을 보겠다는 심산이었는지 의외로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나에게는 참 다행인 결말이었지만, 성업님은 아마 이 때의 결정이 스스로의 인생을 바꾸리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 같다. 그렇게 주말을 함께 보낸 한 대표님과 성업님은 의기투합했고, 성업님은 레진엔터테인먼트의 사업 총괄 이사가 되어 눈부신 활약을 했다. 레진은 웹툰 유료화를 제대로 시작한 최초의 스타트업이 되었고, 카카오 같은 거대 플랫폼이 벤치마킹하는 최고의 유료 웹툰 회사로 초고속 성장을 했다. 모두, 내가 그 때 성업님을 잘 꼬셔서(!) 레진에 합류시켜드린 덕이라 생각하고 항상 으쓱한 기분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하던가. 계속 승승장구하던 레진에 어느새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왔다. 작가들과 공존해야 하는 사업의 특성을 가진 회사에 작가들과 대립하고 갈등하는 경우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경영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함께 극복해나갈 방법을 찾았지만,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어려움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사에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했고, 당시 레진엔터테인먼트 이사회의 일원이었던 나는 다른 이사들과 주주들을 설득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성업님이 대표로서 적임자라고.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을텐데, 그렇게 레진엔터테인먼트의 2대 CEO가 된 성업님은 역시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재능과 노력으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상장사와의 합병을 통해 exit을 만들어 냈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곁에서 지켜봐 왔기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멋진 일을 해 냈는지 만감이 교차했다.

“정말 고생 많았어.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꺼야? 좀 쉴꺼야?” “아뇨, 저 레진에서 아직 못 다한 일들이 있어요. 이번에는 제가 창업자로 새 회사를 만들어서 그걸 해 볼꺼에요.”

그렇다면 이번에도 내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나 혼자가 아닌, 그 동안 성장한 퓨처플레이의 마피아들이 함께 한다면 더욱 더.

이번에도 성업님은 내 제안을 묵묵히 받아들여 주었고, 그렇게 퓨처플레이의 사내창업가(Entrepreneur-in-Residence; EIR)가 되었다. 새로 이사한 서울숲 오피스의 성수동쪽 창가에는 항상 큰 덩치의 그가 앉아서 열심히 사업계획서를 쓰고 있었고, 많은 퓨처플레이어들이 그와 교감하며 멋진 사업계획을 만드는 데 각자의 역할을 했다.

“회사 이름은 노틸러스로 하려구요. 아시죠? 바다를 누비는 잠수함.”

내 눈에는 “해저 2만리” 그리고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 활약한 그 사나이가 보였다. 네모 선장. 성업님은 네모 선장이 되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만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지.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한잔 하면서 들은 이야기지만, 만화를 정말 좋아했지만 자기 정도로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한다”고 하면 진짜 오타쿠들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던 거란다. 이봐, 당신 같은 사람이 진짜 오타쿠라고!

보통은 어떤 사업에서 일가를 이루고 exit을 하면 다른 사업을 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연쇄창업가들이 그랬다. 나를 포함해서. 그런데 이성업 대표님은 다시 웹툰으로 돌아와, 교육을 웹툰으로 하는 “온라인 교육만화” 시장을 새롭게 열어가려 한다. 나는 이 용기가 너무나 멋지다.

노틸러스호에는 이제 네모 선장과 훌륭한 선원들, 그리고 부스터 역할을 하는 퓨처플레이와 수많은 창업가 출신 엔젤들이 타고 있다. 배달의 민족을 만든 김봉진, 야나두의 김민철, 타파스의 김창원… 그래, 선수는 언제나 선수를 알아보지. Real recognizes real.

이제 EIR로서는 너무 덩치가 커진 팀을 이끌고 네모 선장은 서울숲을 떠나 공덕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성업 대표님 어디 가셨어요? 너무 서운해요~” 네모 선장이 떠나자 수많은 퓨처플레이어들은 벌써 그를 그리워한다. 물론, 나도 그렇고. 하지만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잠수함 노틸러스는 언젠가 거대한 모습으로 큰 바다 위에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걸.

◇이성업 대표와의 짧은 인터뷰

만화로 교육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소프트하게 유튜브를 통해서 지식을 습득을 하고 있습니다. 재밌으니까요. 하지만 재미와 지식을 습득하는 밸런스를 맞추기에 최적화된 미디어는 만화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봤던 <먼나라 이웃나라>, <그리스로마신화> 같은 만화들도 모두 교육 만화였습니다. 물론 이런 만화들은 출판물을 통해 나왔었지만, 오늘날 우리 삶에 더 밀접한 웹툰을 통해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붙잡고 공부를 한다? 전국의 엄마들이 기겁할 소리인데요.

당연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20대 이상의 성인을 타깃으로 한 학습만화를 만듭니다. 학습만화라고 아이들 타깃이라고 다들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 랭킹을 보면 성인 교육 만화가 스테디셀러입니다. 만화로 배우는 블록체인은 72주 연속 경제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라와있어요. 만화로 배우는 과학, 만화로 보는 식물, 동물 이런 콘텐츠들이 베스트셀러 100위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콘텐츠에 돈을 많이 쓰지 않습니다.

세상에 이미 나온 데이터라서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5년, 10년, 20년 동안 장기간 팔리는 베스트셀러는 모두 논픽션 교양입니다. 총균쇠, 이기적유전가 같은 책들이요. 이 콘텐츠들이 다루고 있는 지식의 유효성이 길다는 것입니다. 웹툰 같은 즐거운 콘텐츠들은 일시적으로 반응이 폭발적일 수는 있지만, 라이프사이클이 짧습니다. 짧은 기간에 집중해서 수익을 내야죠.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팔아보니 3~4년 반짝해도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매출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식콘텐츠는 정말 긴 호흡으로 매출이 나오고, 절대적으로 비교해도 그 수익이 적지 않습니다.

어쩌다 교육콘텐츠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레진 합류 전, 모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키즈 프로젝트를 준비한 적 있습니다. 2010~2011년 쯤이었죠. 어린이 교육시장이 재밌었습니다. 정말 잠재력이 있었죠. 그리고 레진 나와서 다시 시장을 보니, 교육 콘텐츠 시장이 정말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언제적 뽀로로와 타요가 아직도 등장해서 아이들에게 ‘만화로 알려주는 00′ 영상과 책이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이 시장에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당장 웹툰콘텐츠를 사업화하긴 어려우니, 성인교육시장부터 시작을 하는 것이고요.  회사 이름은 노틸러스지만, 플랫폼 이름은 이만배입니다. 사람 이름이 아니고요. “이걸 만화로 배워?!”의 준말입니다. 정말 이걸 만화로 배우게 될 겁니다. 기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