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투자(나는 그때 투자하기로 했다)에선 현업 투자자가 왜 이 스타트업에 투자했는지를 공유합니다.
퓨처플레이가 투자를 한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는 꼭 써본다. 어쩔 수 없이 자주 쓸 수 없는 제품도 있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써보려고 노력한다. 요즘 그런 내게 좌절을 주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 예를 들면 공으로 하는 운동은 모두 싫어하는 내가 축구 선수들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유비스랩의 ‘사커비’를 써본다거나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데 고양이 화장실을 만드는 골골송작곡가의 ‘라비봇’을 써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축구공을 차본 경험이라도 있고 고양이 까페에서 놀아본 경험도 있기에 어떤 식으로는 간접적으로 이 제품이 고객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지 이해를 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펨텍(femtech)의 영역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으로 태어난 내가 여성의 문제를, 여성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일거다. 그나마 논리적으로 분명한 문제와 똑부러지는 해결책이 있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쉽다. 이전에 소개했던 이너시아의 경우, 무독성 오가닉 생리대의 필요성이 너무나도 분명했고, 일렉트론빔을 이용해서 흡수율이 높은 오가닉 흡수체를 만들어 낸 회사의 기술이 독보적이었기에 크게 주저하지 않고 투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측정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는 더더욱 없는 “여성의 행복”을 다루는 스타트업을 만난다면? 아루와의 만남은 그런 곤란함으로 시작되었다.
퓨처플레이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사실 훌륭한 스타트업을 만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능력보다 우리를 믿고 좋은 창업가들을 소개해 주는 생태계의 동료들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우리 회사의 심사역들이 방방곡곡을 뒤지고 다닌다고 해도, 업계 곳곳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데뷔하는 극초기 스타트업들을 모두 발견해내기란 역부족이니까.
아루의 경우도 퓨처플레이의 자랑스러운 포트폴리오 회사, 우리끼리 용어로 “마피아”인 EO를 통해 발견했다. EO는 독보적인 스타트업 미디어로서의 입지를 활용해서 초기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피어러닝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이 스타트업 스쿨에 참여한 회사 대표님들께 조언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어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라 아쉽게도 온라인으로 진행된 미팅이었는데, 그럼에도 참여하는 대표님들의 열정이 모니터를 뚫고 나올 정도로 뜨거웠다.
그 중에서도 ‘아루’라는 회사의 이명진 대표는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일단 이 분은 다른 창업가들과 달리 큰 뜻을 품고 회사를 뛰쳐나와 사람들을 모으는 식으로 출발한 분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사내벤처를 준비했고, 이제 막 분사를 해서 새롭게 출발하려는 분이었다. 퓨처플레이에서도 수많은 사내벤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사내창업가들을 만나지만, 많은 경우에 직장인으로서 수년, 혹은 수십년간 만들어진 스스로의 모습을 깨고 오롯한 창업가로서 다시 태어나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시곤 한다. 그런데 이명진 대표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일단, 자기가 왜 이 일을 해야 하고, 또 이 일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이 일”, 그러니까 여성이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다양한 성지식을 배우고, 그 과정이 멋지고 자기주도적일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정말 스타트업에게 맞는 일인지 내게는 확신이 없었다.
스타트업이 무엇인가. 여러 정의가 있지만 우리 생태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와이컴비네이터 창업자인 폴 그래이엄(Paul Graham)이 말한대로 “고속 성장하도록 설계된 회사(a company designed to grow fast)” 아니던가. 여기서 말하는 “고속 성장(fast growing)”은 선형적인 성장, 즉 매년 몇 %씩 하는 성장이 아니라, 지수함수적인 성장, 즉 매년 몇 배씩 하는 성장이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연이나 노력에만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성장할 수 밖에 없는 시장을 찾고 또 그 시장에서 적절한 전략을 구사해서 그런 결과를 실제로 만들어 내야만 한다.
아루가 만들고 있는 ‘자기만의방’은 정말 잘 만든 컨텐츠 앱이었지만, 아직 커뮤니티 플랫폼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많았고, 또 그 ‘잘 만든 컨텐츠’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한땀 한땀 노력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남성, 그것도 40대인 나로서는 이 컨텐츠에 열광하는 MZ세대 여성 고객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이 회사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일단 대표님이 너무 당당했다. 사내벤처를 하다가 창업을 하고, 대표로서 큰 부담을 지는 상황이었는데 전혀 그런 미래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당당함의 원천은 시장이, 고객이 자기 팀이 만든 컨텐츠를 사랑한다는 확신이었다. 아, 이런 경우에는 보통 홈런을 치거나 삼진아웃인데.
일단 만나뵙고 말씀을 나눠보기로 했다. 내가 크게 걱정했던 것은 두가지였다. 첫째, 사내벤처로서 출발할 때 기존의 기업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둘째, 단순한 컨텐츠 앱에서 벗어나 세계 여성들이, 아니 종국에는 남성들까지도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 수 있을까.
일단 첫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우려한 대로 홀로서기에 단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었고, 여기에 대해 충분한 조언을 드렸다. 그리고 매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의 회사와 논의해서 이 부분을 바꿔낼 수 있을지 여쭤보았다. 돌아온 답은 단순했지만 묵직했다. “말씀 들어보니 그렇게 해야겠네요. 그렇게 바꿔보겠습니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왜 이런 구조가 생겼고 그걸 바꾸는 게 스스로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잔뜩 설명을 늘어놓아야 정상인데, 이명진 대표는 하나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지금부터 시작할 자신의 회사를 더 스타트업스럽게 만들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라도 더 알고싶어했고, 이해했다면 바로 실행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두번째 문제, 과연 아루가 “고속 성장”, 그러니까 지수함수적 성장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도, 이 대표는 끄덕거리며 내 이야기를 듣더니 “말씀하신대로 지금의 컨텐츠 중심의 서비스는 베이스캠프 넘버 원이네요.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가 무엇이 될지 팀원들과 고민하고 정리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이해했으면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두가지 문제를 모두 풀어가지고 왔다. 첫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회사의 대표님과 논의해서 창업과 성장에 유리한 구조를 이끌어 냈고, 두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납득할만한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를 정리해서 가지고 왔다. 더군다나 왜 지금의 성지식에 집중하는 모습이 그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훌륭한 베이스캠프 넘버 원인지도 잘 설명해 주었고.
이쯤 되면 비록 내가 이 회사의 고객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투자를 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짓궂게도 내게는 정말 이 회사가 제대로 된, 존재하는 문제를 풀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하나 떠올랐고, 그 제안에 대표님은 고민 하나 없이 ‘이해했으면 실행하는’ 모습을 또 보여주셨다.
“대표님, 우리 인연이 맺어진 게 EO 덕분이잖아요. 이번에 EO가 스타트업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나가보시지 않으실래요? 이번 기회에 고객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응원할 수 있잖아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아루는 당당히 그 프로그램, ‘유니콘하우스’에서 3위를 했다. 프로그램 내내 나는 본의아니게 악역을 하게 되었는데, 슈퍼패스로 통과시킨 아루를 하우스 선택에서는 선택하지 않았다던가, 1:1 배틀에서 상대방이었던 한달어스를 너무 열심히 도운 나머지 아루를 탈락 시켜 패자부활전을 겪게 했다던가, 꼽아 보면 대표님 입장에서 화가 나거나 퓨처플레이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이 정말 많았는데, 이 대표님은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이해했고,’ 그렇기 때문에 묵묵히 ‘실행했을’ 뿐이었다. 멋진 최종 결과는 시청자들 또한 이런 아루의 모습에 감동해서 만들어 졌으리라.
그렇게 남자인 나로서는 로그인도 할 수 없는 서비스, 세상의 모든 여성들의 진정한 행복을 키워가는 서비스 ‘자기만의방’을 만드는 아루에, 퓨처플레이는 기쁜 마음으로 투자했다. 몇 주전 떨리는 마음으로 직접 피칭을 했던 TIPS에 아루가 선정되었다는 놀랍고도 신나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그녀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퓨처플레이나 유니콘하우스 시청자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초기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인 TIPS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부담스럽고 떨리는 여정이지만 이명진 대표와 아루팀은 묵묵히 그 산을 올라갈 것이다. ‘이해했고, 그래서 실행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