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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자 백신이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영하 70도의 상태로 백신이 운송돼야한다며 특수부대를 방불케하는 운송작전을 공개한 적도 있었죠. 이 어려운 백신의 운송 중 핵심 기술이 스타트업에서 나왔습니다. 지금도 국내 유통 화이자 백신의 100%는 에스랩아시아(이하 에스랩)의 콜드체인 패키지, 그러니까 냉동 상태를 유지시켜주는 박스를 통해 이뤄집니다.
에스랩아시아는 처음부터 의료, 의약용 콜드체인 비즈니스를 했던 스타트업이 아닙니다. 2014년 첫 창업 당시에는 동남아 시장을 노린 커머스&물류 스타트업이었습니다. 엄청난 피벗을 한 셈이기도 하지만, 이수아(36) 대표는 “피벗이라면 피벗, 아니라면 아니다”라며 “눈 앞에 닥친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합니다. 에스랩아시아와 이수아 대표에게 코로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냉동만두에서 느꼈던 콜드체인 페인포인트요?
“2014년 창업해서 지금 벌써 9년차입니다. 처음 시작했던 아이템과 지금 비즈니스의 모습이 많이 달랐는데요. 첫 창업 당시에는 동남아에 유통과 물류를 같이 했던 스타트업이었어요. 당시 K뷰티가 막 뜨기 시작했어요. 마스크팩이 잘 팔렸죠. 팔고 나서 가장 많이 들어왔던 클레임이 팩이 변질됐다는 것이었어요. 창고에 물건을 두면 날이 너무 더우니까 마스크팩이 말라버려요. 냉장 창고를 구하기도 했는데, 동남아 현지에서 저희가 직접 감독하지 않다보니 현지 창고 업체에서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클레임이 끊이질 않았죠. 마스크팩을 팔다가 식품을 팔기도 했습니다. ‘별그대’가 뜨면서 동남아에서 K푸드 열풍이 불었거든요. 즉석밥이나 냉동만두 등을 보냈는데 다 녹아서 도착하는 일이 빈번했죠.”
스티로폼 박스로 냉동 포장을 해도요?
“보낼 때 스티로폼으로 넣어서 보냈는데, 그것만으로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녹았다가 다시 냉동된 적도 여러번이었거든요. 처음부터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했죠. 아예 동남아까지 크로스보더 콜드체인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냉동 상태를 훨씬더 길게 유지할 수 있는 박스를 직접 만들어 보내면 어떨까. 그렇게 탄생한 단열박스가 ‘그리니에코’였어요. 기존의 스티로폼 박스를 대체할 수 있는 콜드체인 패키지였죠. 진공단열재를 사용했어요. 은박지처럼 생겼지만 단열 성능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훨씬 오랜 기간 박스 안의 냉동 상태 유지가 가능했죠.”
진공단열재, 이름부터 비싸고 새로운 기술일 것 같은데요.
“진공단열재는 우주복에 사용하고, 우리가 쓰는 냉장고에도 쓰여요. 생각보다 아주 비싸거나 희귀한 재료는 아니였죠. 다만 이걸 박스에 넣어서 생산하는 업체가 없었어요. 박스 설계부터 프로토타입 만들 금형까지 전부 처음부터 저희가 다 했어요. OEM을 할 업체도 없었어요. 양산을 할 수 있는 설비도 없어서 생산 설비도 주문 제작해서 받았고 공장을 만들었죠. 생산의 A to Z를 다했죠. 그렇게 양산을 준비했어요. 지금도 진공단열재로 콜드체인 패키징을 하는 업체는 저희 밖에 없는 걸로 알아요.그리고 아예 그리니에코를 국내 유통기업들. 그러니까 주요 마트에 팔 생각까지 했죠. 왜냐하면 스티로폼 박스는 일회용이지만 그리니에코는 3~5년 정도 재사용이 가능해요. 그리니에코 하나가 1년 동안 약 150개의 스티로폼 박스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죠. 박스 가격은 스티로폼보다 비싸지만, 렌탈로 상품화를 했어요. 그러니까 스티로폼 박스 1개 가격이 1500원이라면 그리니에코를 마트에서 1회 렌탈할 경우에도 같은 1500원을 받는 방식으로요. 실제 마트들에도 공급을 했어요.”
TBT 투자 30억원을 유치한 것도 공격적인 사업 확장을 위한 것이었군요.”네. 양산을 위한 설비 투자가 필요했으니까요. 준비가 끝났고, 이제 국내 콜드체인 패키지 렌탈 사업과 동남아 커머스&물류 사업도 승승장구할 줄 알았어요. 코로나가 터졌어요. 박스에 포장을 해도 동남아로 보내는 항공 물류 비용이 4배나 뛰어서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질 않았어요. 국내 마트라도 괜찮았으면 다행이었는데, 코로나니까 사람들이 나와서 장을 안 봤죠. 마트 물류도 확 죽었습니다.
그때 화이자 백신이 국내에?
”그때 팀원이 25명쯤 됐어요. 코로나가 얼마나 갈까, 이게 올해 안에 끝날 수는 있을까. 겨우겨우 버티면서 뉴스를 보는데 백신이 한국에 들어온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영하 수십도의 냉동 상태에서만 들어올 수 있다더군요. 이때다 싶었습니다.”
원래 고기나 생선을 넣는 박스에 백신을 넣어도 되나요?”그리니에코를 만들기 위해서 훨씬 더 성능 좋은 프로토타입을 여럿 만들었어요. 국내는 콜드체인 규정이나 프로세스가 거의 없습니다. 특히 식품은 거의 없고, 있어도 바이오. 그러니까 해외에서 비싼 신약을 들여오거나 운송하기 위해서 제약사들이 콜드체인 물류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을 뿐이죠. 그래서 그리니에코를 만들 때 제약과 바이오 쪽에서 물류 분야에 종사했던 연구원들을 많이 뽑았어요.
‘기왕 만들거 제대로 만들자’며 아예 바이오 시장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성능 제품을 여럿 만들어봤죠. 미국와 유럽 같은 제약 선진국에서는 콜드체인에 대한 굉장히 깐깐한 기준이 있어요. ISTA라는 미국의 안전수송협회에서 FDA 의약품 수송기준에 준하는 의약품 수송용 등급(7E)를 별도로 주거든요. 그러니까 저온 유지가 필요한 약을 운송할 수 있는 기준에 적합한 수송용 박스라는 것이죠. 저희 연구소에서 이 등급을 취득했죠. 지금도 민간기업에서 등급을 취득한 회사는 전세계 16곳 정도로 알고 있어요.”
그렇게 좋은 시제품을 만들고 안 팔았었다?
”네. 그래서 시제품을 만들 때 주변에서도 ‘시제품 성능을 뭘 이렇게 좋게 만드느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양산용 제품 수준의 기술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느냐고요. 기술 수준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실험해보고 싶었죠. 그렇게 고성능 콜드체인 패키지를 만들어놓고 출시를 안했었죠. 생산단가도 훨씬 비쌌거든요. 그런데 코로나가 터졌고, 화이자를 들여올 콜드체인 패키지가 필요했어요. 정부, 기업 모두 코로나를 운송할 박스를 찾는데 혈안이 됐다는거에요. 일단 시도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컨소시엄에 저희 박스를 냈어요.”
어느 정도 성능입니까”5일 동안 영하 70도의 상태가 유지가 돼요. 엄청난 오버스펙인 것이죠. 그때 여러 업체가 화이자 운송용 박스를 제출했는데 에스랩이 1등을 했어요. 2등 업체 성능의 2배 이상으로 좋았죠. 그래서 화이자 운송용 박스로 발탁이 됐고, 그때 만들었던 프로토타입 제품을 양산 제품으로 출시한 것이 ‘그리니메디’입니다. 초저온 운송이 필요한 의약시장용 콜드체인 패키지죠.”
가격이 비싸겠는데요
”아뇨. 당시에도 화이자 박스를 해외에서 들여오자는 의견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 제품이 미국과 독일 같은 나라의 제품보다 더 쌌죠. 국내 인건비가 더 저렴하고, 박스를 수입해오는 물류비도 없었고, 소재와 기술이 달랐으니까요. 그리고 최근엔 동남아로 설비를 옮겨 생산을 동남아에서 하고 있어요. 가격은 점점 저렴해지고 있어서, 가격 경쟁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화이자가 한국에 들어오기로 하고, 도착하기 전까지 최고로 힘들었죠. 정말 별을 많이 봤어요. 경기도 화성에 있는 공장에서 전 직원이 작업을 마치고나면 새벽2~3시였고 주변이 깜깜했죠. 화이자 백신이 비싸기도 했지만, 그때는 화이자 백신 1병이 굉장히 소중했을 때니까요. 1병도 변질되서는 안 됐으니까. 박스 양산부터 불량까지 정말 꼼꼼히 체크했죠.”
성장이 무척 가파르겠습니다
“매출은 작년 54억원이었고, 전년 대비 5배 정도 늘었습니다. 올해는 3배 정도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에스랩에게 코로나란?
“창업은 모든 순간에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것 같아요. 세상은 어떤 큰 물결대로 가고, 저희는 그냥 그 위에 떠서 노를 저어 가는 배 같은 기분요. 그때그때 기회를 보고 또 부딪혀서 가라앉지 않게 그냥 열심히 노를 젓는 것이죠. 외부에선 에스랩이 여러 번의 피벗을 했다고 말씀하시는데…
피벗이라면 피벗이고 아니라면 아닙니다. 조금씩 피벗이라고 해야하나요. 옆으로 한걸음씩요. 결단을 하고 사업 모델을 뒤집은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닥쳤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 이것저것 기술과 사업 모델을 붙였던 것이죠. 커머스를 하다 필요해서 콜드체인 물류를 붙였는데, 그게 또 코로나로 의약품 콜드체인까지 됐으니까요. 물류에서 제조업처럼 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큰 흐름에서 이 모두가 어떤 시너지를 내기 위한 운명 같은 과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