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앉아도 벨벳 털이 눕지 않죠? 저희가 개발한 마이크로벨벳 덕분이에요.”
지난 20일 벨벳 전시관인 대구 삼덕동 영도다움에서 만난 류병선(82) 영도벨벳 대표는 벨벳으로 만든 소파 커버를 쓰다듬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영도벨벳은 1960년 류 대표와 남편 고(故) 이원화 회장이 함께 창업한 국내 최대 벨벳 기업이다. 창업 40여 년 만인 2001년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른 뒤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류 대표는 “기술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에 60년 넘게 한 우물만 팠더니 세계 최대 벨벳 공장(구미)을 갖추게 됐다”고 했다. 벨벳은 털이 촘촘하게 박힌 섬유 조직으로 의류·소파 등 다양한 제품에 쓰인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구찌, 버버리 등 명품 기업들도 영도 벨벳의 고객사다.
◇맨손으로 일궈낸 벨벳 국산화
류 대표 부부는 처음 직기 4대를 빌려 고무신에 들어가는 방한용 털 납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계절 상품이라 한 해의 반은 꼼짝 없이 놀아야 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게 벨벳이었다. 생산이 까다롭고 가격도 비싸 당시엔 독일·일본 밀수품만 유통됐다. 류 대표 부부는 벨벳 기술도 지식도 전혀 없었다. 독일제 원단을 가져다 국내 연구소에 분석을 맡겨봤지만 소용없었다. 류 대표 남편이 8개월 밤낮으로 기계 앞에 붙어앉아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원단 짜는 방법을 알아냈다. 류 대표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1968년 벨벳 국산화에 성공했다. 1975년부터 수출도 했다. 1988년 1000만달러 수출탑을 받고, 1990년엔 물로 세탁해도 모가 눕지 않는 마이크로벨벳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류 대표는 다시 주부로 돌아갔다.
1990년대 중반 대구 섬유 기업 70% 이상이 중국 등 해외로 공장을 옮길 때 영도벨벳은 구미 공장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를 지키겠다는 의지였지만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며 회사는 부도 위기에 처했다. 환율이 800원에서 2000원으로 치솟자 달러로 빌린 직기 리스 부채가 100억원대에서 순식간에 300억원대로 불었다.
류 대표는 이 무렵 다시 경영에 나섰다. 그는 “당시 지인들이 그냥 부도를 내라는 얘기를 많이 했지만 남편한테 ‘아이들에게 절대 회사 부도낸 부모로 남지는 말자’고 설득했다”고 말했다. 이후 류 대표 부부는 해외로 뛰고, 문턱이 닳도록 은행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집까지 담보로 잡히며 악착같이 노력한 끝에 영도벨벳은 2004년 워크아웃을 조기 졸업했다. 하지만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건강이 나빠진 남편은 워크아웃 졸업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류 대표는 “그나마 워크아웃이 끝난 걸 보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했다.
◇1등 섬유 기업에서 첨단 소재 기업으로
영도벨벳은 사업 다각화를 위해 연구비 100억원을 들여 산업용 벨벳 개발에 나서 2006년 ‘LCD(액정표시장치) 러빙포’ 국산화에 성공했다. 러빙포는 LCD의 액정 분자를 일정한 방향으로 정렬해주는 핵심 섬유 소재다. 2011년 LG디스플레이가 애플에 공급한 아이패드2 LCD 패널에 처음 사용됐고, 이후 세계로 수출하고 있다. 현재 영도벨벳 매출의 45%가 러빙포에서 나온다. 지난해 영도벨벳 매출은 196억원이다.
영도벨벳은 차세대 먹거리로 공기 중 미세 먼지나 중금속 이온 물질을 흡착하는 환경필터 벨벳 등 전기차에 들어가는 첨단 소재를 개발 중이다. 82세 나이에도 에너지가 넘치는 류 대표는 “1등 섬유 기업에 그치지 않고 첨단소재 기업으로 도약해 100년 기업이 되겠다”고 말했다.
류병선 영도벨벳 대표
1960년 남편 고(故) 이원화 회장과 공동 창업
1988년 1000만달러 수출탑
2005년 여성기업인 대통령표창
2010년 3000만달러 수출탑
2019년 금탑산업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