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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을 벗어나 지방 도시에 기반을 둔 스타트업에 투자를 하려는 투자자에겐 약간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수도권 소재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돼있을 가능성이 높아 좋은 조건에 투자를 할 수 있고 지자체의 직간접 지원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시장이 좁고 채용이나 자금 융통이 어려워 빠른 성장을 도모하기가 쉽지 않다는 핸디캡이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춘천에 있는 메타버스 전문 기업 더픽트(대표 전창대)가 딱 그런 경우다.
“저는 꼭 투자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재작년 8월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어느 더운 여름 날, 강원대학교 내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회의실에서 진행된 투자 심사에 참석한 전창대 대표는 ‘투자를 받으면 그 돈을 어떻게 활용할 계획인가’라는 질문에 뜻밖에도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심사장은 일순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투자를 안 받아도 좋다고? 그럼 이 사람은 여기 왜 나타난거지. 굳이 투자받지 않아도 상관 없다는 창업가에게 투자해야 할 이유는 뭐람. 전 대표가 퇴장한 뒤 갑론을박을 벌인 소풍벤처스의 투자심사위원들은 결국 투자를 결정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메타버스붐 이전부터 강원도서 XR을 파더니
전창대 대표는 중학교를 마친 뒤 IT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해 디지털방송 전공을 하며 일찌감치 영상 촬영-편집 전문가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 바로 영상 프로덕션에 취직했다가 더 많은 배움을 위해 다시 대학에 진학했다. 한 때는 방송 기자를 꿈꾸기도 했지만 때마침 찾아온 VR의 세계에 눈을 뜨고 대학 창업동아리로 시작한 더픽트가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입주기업으 로 선정되면서 사업가로서의 인생 행로가 시작됐다.
처음엔 360도 카메라로 영상을 찍은 뒤 그 영상들을 이어붙여 마치 하나로 연결된 공간을 보는 듯한 체험을 가상공간에서 제공하는 영상 컨텐츠를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여기에 다양한 IT 기술을 결합시켜 실제 현실공간을 능가하는 풍부한 이용자 경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때 마침 글로벌 기술시장에서는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이 각광을 받고 있었다. 이런 흐름을 타고 더픽트는 지역에서 독보적인 XR(확장현실 : 증강현실 가상현실 혼합현실 등 다양한 몰입형 컨텐츠 서비스를 아우르는 용어) 전문기업으로 떠올랐다.
강원도청은 매년 큰 규모의 산업전시회를 개최해 왔는데 이를 위해 큰 공간을 임대하고 참가 기업들의 부스를 개별적으로 설치하고 모객을 위해 홍보에 돈을 많이 써야 했다. 더픽트가 이 전시회를 가상공간으로 옮겨 왔다. 실제와 똑같이 재현된 가상의 공간에서 각 기업들의 제품과 서비스를 둘러보고 회사 담당자와 채팅까지 할 수 있게 돼 참가자는 예년의 몇 배로 늘어났고 참가 지역도 전 세계로 확장됐다.
더픽트의 역량이 입소문을 타면서 여러 기관들의 주문이 밀려들었다. 직원들이 하나둘 늘어났고 외주 계약을 하나 마칠 때마다 사무실엔 새로운 촬영 장비와 고사양 컴퓨터가 들여졌다. 비좁은 보육공간을 벗어나 춘천시의 융자를 받아 시청 근처에 5층 짜리 독립 사옥도 장만했다. 헤드셋이나 안경 같은 하드웨어 기술이 주춤하면서 XR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좀 시들해지나 싶은 시점에 이번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대세가 된 비대면-원격 소통의 유력한 대안으로 메타버스 바람이 거세게 밀려왔다. 이때부터 더픽트의 경쟁력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로블록스나 제페토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메타버스 서비스들은 대부분 독자적인 서비스 플랫폼 안에서만 작동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꽤 덩치가 큰 앱 파일을 다운로드 받아야 하고 그 안에서 작동되는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지정된 개발 도구만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클라우드 서비스가 일상이 된 시대에 이용자들은 자신의 스마트폰이나 여러 디바이스로 메타버스에 접속해 고퀄리티의 영상과 다양한 쌍방향 소통 서비스를 초고속으로 자유롭게 즐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서비스들은 폐쇄형 앱 서비스 위주여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픽트는 개방형 웹 기반으로 메타버스를 구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확실한 차별화를 도모한다는 전략을 세웠고 이는 시장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전 대표는 통상 텍스트와 이미지 파일로 구성되는 기존의 2차원 홈페이지가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3차원의 메타버스 공간으로 점차 바뀌어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강원대학교의 경우 단순히 캠퍼스를 소개하는 것 뿐 아니라 수강신청이나 도서 대출과 같은 학교 생활 전체를 메타버스에서 구현할 수 있는 웹 기반 메타버스 체계를 더픽트의 도움으로 구축했다. 더픽트는 꾸준한 매출 성장과 채용 증가 공로로 지난 해 말 강원도청으로부터 ‘일자리 대상’을 수상했다.
◇“글로벌을 노리지만, 로컬이 무너지게 둘 수는 없다”
이렇게 사업 쪽에서는 꾸준히 성장을 거듭하고 있지만 전 대표의 마음 속에서는 새로운 고민과 질문도 함께 커졌다. 창업 초기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서비스를 만들어 고객에게 제공하는 재미로 날밤을 새워도 피곤한 줄 몰랐지만 회사가 점차 성장하면서 새롭게 다가오는 고민들, 이를테면 채용이나 조직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금은 어떻게 융통하고 이익금이 생기면 이걸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지자체를 비롯해 지역의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 장기적으로 회사의 미래 모습을 어떻게 디자인 할 것인지 등등 ‘개발자’가 아닌 ‘사업가’로서 결정해 가야 할 수많은 문제들과 씨름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 대표가 투자심사장에서 꼭 투자를 받으려는 건 아니라는 ‘폭탄 발언’을 한 것도 이런 고민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업자금 부족에 허덕이며 투자자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형편은 아니지만 회사의 장래를 함께 상의할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소풍 역시 단기간의 재무적 성과 뿐 아니라 전 대표가 기업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 도 큰 의미를 두고 그가 엉거주춤 내미는 손을 덥썩 잡은 셈이라 하겠다. 전 대표는 올 초 “투자를 받은 뒤 투자자들과 회사의 경영 현황 자료를 놓고 토론을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 기업인으로 자신이 성장해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일단 투자를 결정했지만 함께 방향을 잡아야 할 사안들은 계속 이어졌다. 우선, 지역의 창업자들을 만나다 보면 자기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을 B2G (business to government), 즉 ‘정부 고객’을 타겟으로 하는 사업이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는 일시적 착시 때문인 경우가 많다. 민간의 구매 수요가 많은 수도권과 달리 지역엔 큰 기업들이 적어 상대적으로 공공 부문의 구매 비율이 60~70%로 높다. 그래서 사업자 입장에선 대부분의 매출이 지자체나 산하기관과의 거래에서 발생하다 보니 자신을 공공구매형 사업자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업의 본질을 뜯어 보면 오히려 민간 영역에서 더 넓은 시장을 확보할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경우 투자자들은 창업가에게 공공시장에 안주하지 말고 B2B (business to business) 시장, 기업 간 거래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개발과 투자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더픽트는 외형만 보면 B2G로 보이기 딱 좋은 사업체이다. 그간 해 온 사업실적 가운데 상당수가 강원도청 한국거래소 중앙소방학교 등 전국의 유수한 지자체 및 공공기관들이기 때문이다. 투자사들은 대개 B2G 모델의 창업가에겐 투자를 꺼리게 된다. 왜냐하면 정부나 공공기관은 비교적 안정적인 매출원이긴 하지만 그 범위가 딱 정해져 있기 때문에 ‘확장성’이라는 측면에서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또 민간의 기업고객이나 개인 고객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끊임 없이 제품을 고도화 하는 노력을 하는 대신 공공 부문 계약을 따내기 위해 로비나 관계 만들기에 집중하다 보면 핵심 경쟁력 강화라는 중요한 것을 놓칠 우려도 있다.
그런 딜레마에서 전 대표는 매우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다. 웹을 기반으로 구축되는 메타버스 서비스가 일반화 되면 텍스트와 이미지로만 구성돼 있는 지금의 기업 홈페이지가 머지 않아 XR 기술을 활용해 훨씬 풍부한 컨텐츠를 제공하는 메타버스형 홈페이지로 바뀌게 될테고 그 부문에서 더픽트가 가장 앞서가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데, 지금까지는 큰 이벤트 용 홈페이지를 필요로 하는 고객이 주로 지자체나 공공기관이어서 이들을 테스트베드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투자자 입장에서 고민하게 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지역 기업의 한계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다. 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는 지방 도시의 경우 인구가 정체해있거나 계속 감소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이 점점 작아지고 따라서 매출도 장기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투자금을 넣고 몇 년 안에 그 지분을 되팔아서 남은 이익을 출자자에게 돌려줘야 하는 투자자 입장에서는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기업에 대한 투자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전창대 대표는 이 지점에서 ‘더 큰 시장’을 찾아서 회사를 수도권으로 옮기기 보다는 자신이 지역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지역 경제가 무너지지 않게 한다는 ‘로컬 우선’의 길을 선택하지만 이런 지역 밀착형 사업모델이 갖는 보편성이 글로벌 시장에서 반드시 통할 것이라는 ‘글로컬(global+local) 노선’에 무게를 두고 있다.
더픽트는 올해 창업 6년째를 맞아 1월 8일부터 일주일 간 전 직원이 아랍에미리트로 연수를 다녀왔다. 전 대표는 올해 시드 투자를 한 번 정도 더 받은 뒤 내년부터 본격적인 기관투자 유치에 나설 계획이다. 매출 지표를 쑥 끌어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대규모 투자 유치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와 함께 더 큰 기업인으로 변신해 갈 전 대표의 미래 모습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