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주안국가산단 내 동아알루미늄(DAC)의 공장에서 만난 라제건 회장이 새로 개발 중인 텐트 안에서 텐트 폴(pole·기둥)을 잡고 포즈를 취했다. 라 회장은 지난 2022년 미국 아웃도어 전문 매체 '아웃사이드'에서 '텐트의 왕(king of tents)'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전기병 기자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세계 최대 이커머스 업체 아마존의 캠핑 의자 부문 1위. 노스페이스·몽벨·콜맨 등 세계 10대 아웃도어 업체 중 9곳을 고객으로 둔 업체.

이런 화려한 이력의 기업 본사는 인천 서구 주안국가산단에 있었다. 지난달 26일 공장에서 만난 라제건(70) 동아알루미늄(DAC) 회장은 “우리 캠핑 의자가 200만개 넘게 팔렸는데, 업계에서는 ‘캠핑 의자계의 에르메스’라고도 불린다”며 환하게 웃었다. 라 회장은 이 자리에서 37년째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직원 147명. 동아알루미늄이 2009년 론칭한 아웃도어 캠핑 브랜드 ‘헬리녹스(Helinox)’는 미국 아마존에서 캠핑 의자 상위 10개 중 5개 이상을 차지했던 적도 있다.(지금은 짝퉁 제품이 쏟아져 순위는 조금 밀려 있다) 지난 4월 미국 매체 US뉴스앤드월드리포트는 ‘2024년 최고의 캠핑 의자’로 헬리녹스를 선정하기도 했다.

이 회사의 당초 주력은 텐트 폴(pole)이었다. 노스페이스·몽벨·콜맨 등 세계 10대 아웃도어 브랜드 중 9사에 텐트용 폴을 납품하고 있고, 미국의 아웃도어 전문지 ‘아웃사이드’는 라 회장을 ‘텐트의 왕(King of tents)’이라고 명명했다. 동아알루미늄은 매출의 95%가 해외에서 나오고 있다. 라 회장을 만나 글로벌 경쟁력까지 갖춘 중소기업을 일군 긴 스토리와 비결을 들어봤다.

그래픽=박상훈

◇무역업 한 아버지에 이어 제조업에 투신

라 회장은 6·25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상공부 차관, 산업은행 총재 등을 지낸 고(故) 라익진 동아무역 회장이다. 연세대에서 사학과 경영학을 전공한 라 회장은 당시로는 드물게 미국 미시간대에서 MBA(경영학 석사)까지 마치고 대우통신과 미국 은행을 다녔다. 하지만 은행 일이 맞지 않아 회사를 그만뒀고, 1987년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아무역에 기획실장으로 합류했다. 라 회장은 “가발이나 의류를 팔았던 것처럼 ‘결국 제조업만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생각에 알루미늄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미국에 있던 형이 양궁 화살 사업을 시작한다는 얘기가 알루미늄 제조 업체 창업의 계기가 됐다. 화살촉에 쓰는 ‘고강도 알루미늄 튜브’는 강도가 철의 2배쯤 되는데, 세계 알루미늄 시장은 미국의 ‘이스턴’이란 회사가 독점하고 있었다. 라 회장은 “이스턴 회장이 양궁 대회 때마다 우리 선수들에게 메달을 걸어주는 걸 보고선 ‘저 사람만 따라잡으면 1등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화살 산업은 유행도 잘 타지 않는 기술집약적 산업이라 ‘1등만 꺾는다’는 일념으로 알루미늄 시장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세계 1등 텐트 폴 회사로 성장

문과 출신인 라 회장에게 제조업의 벽은 높았다. 1988년 당시 국내에서 최초로 고강도 알루미늄을 연구한 삼선공업의 기술총괄 엔지니어와 함께 인천에 고강도 알루미늄 제조 공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공부하지 않고서는 R&D(연구·개발)도 없다’는 생각에 직접 발로 뛰었다. 서울대 금속학과, 연세대 금속공학과, 카이스트 재료공학과 등을 찾아 교수들에게 “작은 기업이지만 한 번만 도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고, 대학원생과 함께 연구도 진행했다. 경남 창원에 몰려 있는 알루미늄 공장들도 한 달에 몇 번씩 오갔다.

1년여의 연구 끝에 무게를 기존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인 알루미늄 신소재 텐트용 폴 ‘DA-17′ 개발에 성공했고, 이듬해인 1991년에는 이 소재를 활용한 첫 4~5인용 텐트도 선보였다. 일본 내 아웃도어용품 1위 브랜드 ‘오가와(Ogawa)’의 다마우라 대표가 직접 인천 공장을 찾아 계약을 맺으며 1992년 매출은 158% 급증해 23억원까지 치솟았다. 1999년에는 미국 노스페이스가 동아알루미늄이 개발한 신소재 ‘페더라이트(feather-light)’를 적용한 모델을 출시하며 ‘초경량 텐트’의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불과 2~3년 뒤 대부분의 브랜드는 고급 제품에 DAC 텐트 폴을 쓰기 시작했고, 업계 최강 브랜드 이스턴을 꺾고 ‘프리미엄 텐트 폴 시장’의 90%를 차지했다.

◇OEM 벗어나 자체 브랜드까지

하지만 라 회장의 꿈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9년엔 태양신을 뜻하는 ‘헬리’와 밤의 여신 ‘녹스’를 합친 새 브랜드 ‘헬리녹스’를 만들었다. 그는 “독일 레키(Leki)는 자체 브랜드로 등산용 스틱을 만들어 업계 1위에 올라섰지만, 오스트리아 컴퍼델(Komperdell)은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에만 몰두하다 시장점유율이 뚝 떨어졌다”며 “자체 브랜드가 있어야 진정한 세계 1위로 거듭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새 브랜드를 알리는 데 어려움도 컸지만, 미국∙유럽 등을 오가며 미국 최대 소매 체인 REI 등 세계적인 유통사들과 협업해 발 빠르게 시장에 진입시킬 수 있었다.

헬리녹스 캠핑 의자 중 대표 상품인 '체어원'.

헬리녹스는 캠핑용 의자와 테이블 등 아웃도어용품을 내놨고, 2012년 신발주머니에 넣을 정도로 줄인 초경량 의자를 개발하면서 세계 시장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4~5kg에 달해 휴대하기 어렵던 접이식 의자를 5분의 1도 안 되는 800g짜리로 내놓자 시장을 휩쓸었다. 아마존에서도 제품들이 잇따라 히트를 치며 ‘캠핑업계의 명품’ 지위를 차지했다. 라 회장은 “돗자리 깔고 앉던 캠핑이 의자 중심으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 같은 성공을 발판으로 헬리녹스는 2013년 별도 법인으로 분사했고, 라 회장의 아들 라영환(40) 의장이 그 바통을 넘겨받아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비록 70세의 나이지만 라 회장의 도전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3년 전부턴 자신의 영문 이름을 딴 브랜드 ‘제이크라(JakeLah)’를 론칭해 마니아 캠핑족(族)을 위한 전문가용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재작년부터는 사회 공헌 프로그램 ‘볼런티움’으로 취약 계층 3600명에게 무상으로 캠핑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라 회장은 “아직 내 브랜드 개발은 끝나지 않았다”며 “30년 넘게 해온 아웃도어 캠핑의 성과를 이젠 사회에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