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역에서 출발해 학여울역까지 갈 때, 가야 하는 길을 지하철 노선도에 한번 그려보세요”.

최근 ‘눈높이 선생님’들은 학생 집을 방문해 국어·영어·수학이 아닌 이 같은 내용이 담긴 학습지로 수업을 한다. 이는 ‘눈높이’를 만드는 대교의 시니어 전용 학습지 ‘브레인 트레이닝’으로, 선생님들이 만나는 학생도 어린 학생들이 아닌 백발의 노인들이다. 시니어 학생들은 치매 예방을 위해 ‘전화번호 외우기’ ‘돈 계산하기’ ‘한자 따라 쓰기’ ‘분리수거 하기’ 등의 내용이 담긴 학습지를 푼다. 1주일에 한 번 20분씩 수업을 하는데, 교재를 포함해 매달 12만원이다. 한 교사는 “홀로 사는 노인이 많다 보니 자식들이 부모님을 위해 학습지를 신청해주는 경우도 많고, 이미 학습지를 하고 있는 손자, 손녀와 함께 사는 어르신들이 직접 신청하기도 한다”며 “내용도 시니어 맞춤형인 데다가 선생님이 말동무까지 해주니 요즘 신규 등록 학생들은 대부분 고령층”이라고 했다.

유소년 학습지 업체 양대 산맥인 교원(구몬)과 대교(눈높이)가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대응해 ‘시니어 학습지’로 눈을 돌리고 있다. 만성화된 저출생으로 학습지 주요 고객이던 유소년 인구가 크게 줄면서 학습지 업체들은 오랜 침체기를 겪고 있다. 대교 역시 지난 3년간 해마다 200억~5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고령화가 급속 진행되자 고육지책으로 치매 예방 등 시니어 교육 사업에 나선 것이다. 치매 예방 특화 교재와 교구뿐 아니라, 건강하고 경제력까지 갖춘 ‘액티브 시니어’를 겨냥한 서비스도 선보이고 있다.

그래픽=이철원

◇‘시니어 학생’ 공략하는 학습지 업체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유소년(0~14세) 인구는 548만5000명으로 최근 5년 사이 17% 이상 줄었다. 반면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993만8000명으로, 같은 기간 30% 가까이 증가했다. 학습지 업체 입장에선 유소년 인구의 2배에 가까운 시장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특히 고학력에 자기 개발 의지가 강한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은퇴하면서 건강하고 경제력까지 갖춘 ‘액티브 시니어’가 증가하고 있는 점도 매력 요소다.

‘구몬’ 학습지를 만드는 교원그룹은 지난 5월 시니어용 서비스 ‘액티브라이프’를 출시했다. 한자·영어·국어·수학·일본어·브레인쏙쏙 등 총 7과목에 대한 학습지 및 방문 교육을 제공하고, 월별로 읽을 거리와 인지능력, 계산력 등 향상을 위한 인지 활동 내용이 담긴 잡지를 추가로 제공한다. 구몬 한자와 영어 학습지를 푸는 박모(67)씨는 “단순한 문제를 반복해서 학습할 수 있어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며 “친구들 만나면 화투나 치며 시간을 허비하는데 공부를 하니 삶이 더 만족스럽다”고 했다. 어린이 교육 사업을 하는 웅진씽크빅도 최근 상조 서비스 기업 프리드라이프와 제휴를 맺고 시니어 고객층 확대에 나섰다.

그래픽=이철원

◇말동무 역할도 하는 ‘방문 교육’

학습지는 학원이나 복지센터를 직접 찾아갈 필요 없는 ‘방문 교육’이라는 점도 시니어들에게는 장점이다. 교사가 집으로 방문하다 보니 몸이 불편하거나 홀로 사는 고령층의 자식들이 부모의 수업을 신청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한 25년 차 학습지 방문교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해 수업만 하는 게 아니라, 어르신들 말동무도 돼 드리고 건강이나 집안 상태를 살펴드리니 만족도가 높다”며 “최근 몇 달 새 수업을 시작한 학생 대부분이 시니어”라고 했다.

학습지 업체들은 시니어 특화 학습지뿐 아니라, 취미 생활 등을 위한 성인용 학습지로도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최근 다양한 외국어를 넘어 사주 풀이 방법, 심리 상담, 작사, 소설 쓰기와 같은 다양한 내용이 학습지로 만들어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태블릿PC 등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젊은 세대와 달리 중장년과 시니어 고객은 종이에 직접 써야만 공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인구 감소로 정체된 학습지 사업의 새로운 돌파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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