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상하이에서 세미파이브의 조명현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중국 반도체의 생태계가 어마무시하다”며 “한국 행사보다 사람이 200배쯤 많고, 중국 기업들의 기술 수준이 이제 상당하다”고 했습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정말 긴장해야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세미파이브는 반도체 디자인플랫폼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입니다. 팹리스, 그러니까 엔비디아 같이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들이 TSMC와 삼성전자 같은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에 찾아가기 위해서는 설계도를 보고 물리적인 칩을 구현해줄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이 조력자를 디자인하우스라 부르고, 세미파이브는 조력자를 하면서 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기술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입니다. 반도체 산업의 가교 역할이자, 한국 대표 디자인플랫폼 스타트업이죠. 조명현 대표가 느끼는 반도체 산업의 체감 트렌드가, 실제 현장과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2호와 조명현 대표의 파운드리 산업 분석 유튜브)
조 대표는 특별 기고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상하이 분위기를 전달하고 싶다고요. 마침 중국 창신메모리(CXMT)가 DDR5 D램 양산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19일 전해졌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력 제품이자 기술 해자였던 DDR5가 본격적으로 침범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공정의 수준, 높은 수율 등 정보가 파편적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진짜 위기가 다가온 것입니다. 조 대표의 기고를 전합니다.
◇ICCAD China에 300여개 업체 참가
매년 12월, 중국의 반도체 산업 주요 행사인 ‘ICCAD China’가 개최된다. 중국 반도체 산업협회(CSIA)가 주관하는 이 행사는 반도체 설계 부터 후공정 및 응용 분야까지 아우르는 대규모 전시·컨퍼런스다. 올해 행사는 상하이 세계 박람회 전시회장에서 성대히 치러졌으며, 300여 개 이상의 업체가 부스를 마련했고, 필자를 포함 약 150명에 달하는 연사들이 이틀 동안 반도체 관련 기술 및 사업 현황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규모 보다도 진정 인상적이었던 것은 설계, IP, EDA, 후공정, 장비, 검사 등 반도체 밸류체인 전 영역을 아우르며 역동적인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열기 가운데 중국 반도체 산업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핵심 전략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변곡점을 맞고 있는 반도체 산업 그 누구에게나 많은 시사점을 주는 행사라 하겠다.
작년 광저우에서 개최된 ICCAD China와 비교했을 때 가장 놀라운 변화는, 불과 1년 사이에 중국 반도체 산업의 전략적 초점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행사에 참여했을 때에는, 중국 반도체 생태계가 어드밴스드 패키징과 테스트 등 후공정에 굉장히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었다. 고도화된 후공정을 통해 첨단 반도체 기술에 대한 미국의 제재를 우회할 수 있는 보완책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올해 상하이에서 체감된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일시적인 보완책에서 벗어나 반도체 설계의 도구인 EDA 툴, 핵심 지적 재산권 (IP), 그리고 설계 플랫폼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비약적으로 커진 것이다. EDA 툴과 IP는 반도체 설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출발점이지만,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기술이다. 이러한 영역에서 자체적인 솔루션을 만들어 종합적 반도체 역량을 내재화하려는 중국의 장기적이고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1년 만에 이렇게 확연한 변화를 실행하는 중국 반도체 생태계의 기민함에 필자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시장 영향력 여전한 TSMC, 필사적인 중국... 씁쓸한 상하이의 밤
중국 반도체 산업 뿐만이 아니다. 이번 행사에서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 역시 중국 반도체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놉시스, 케이던스 등 미국 주요 업체들도 부스를 열고 적극적으로 기술력을 뽐냈으며, 특히 TSMC는 여전히 이번 행사의 최대 스폰서로 영향력을 뽐내고 있었다. 미국의 제재에 발맞춰 중국에 7nm 이하 웨이퍼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시회장 입구부터 TSMC의 깃발을 휘날리고, 전시장 중앙 단연 돋보이는 위치에 부스를 마련한 것은 ‘장기적으로 중국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놓치지 않을 것’라는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다수의 한국 기업들도 이번 행사에 참여하여 중국 반도체 생태계에 대한 종합적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세미파이브는 전시 부스와 세션 발표를 통해 높은 수준의 설계 플랫폼을 소개했으며, 삼성전자 역시 기조 연설을 통해 반도체 생태계에서 삼성의 기술력 및 영향력을 강조하였다. 그 밖에 오픈엣지, 블루닷, 퀄리타스와 같은 국내 IP 업체들도 대한민국 IP 기술의 우수성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중국 업체들과 소통했다. 대중 제재로 인해 첨단 기술에 대한 갈증이 큰 중국 고객사들 역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소개하는 내용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다만, 행사장 전반에서 감지된 중국 정부와 업계의 역동적이면서도 조직적인 움직임에 비하면, 한국 반도체는 개별 기업 단위의 참여에 머무른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국제 반도체 산업은 더 이상 한 국가가 독주하기 어려울 만큼 복합적이고 긴장된 무대가 되었으며, 한국 반도체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진정으로 생태계를 구축하고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로드맵이 없다면,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지정학적 리스크 속에서 언제든 뒤처지거나 휘말릴 위험이 크다. 중국 반도체 산업이 철저한 장기 전략과 발 빠른 실행력을 통해 자국 내 생태계를 어떻게든 완성하려고 매진하고 있는 상황에서,한국 또한 중장기적 안목으로 국가와 산업이 함께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하겠다.
필자는 학창 시절,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한민국의 가요계를 뿌리 채 흔들어 놓는 것을 직접 경험하였다. 그들의 히트곡 중 ‘환상 속의 그대’의 가사 중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세상은 빨리 돌아가고 있다 // 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 //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상하이 전시회장을 나오며, 우리는 과연 그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안주하지 않고 얼마나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돌아보았다. 메모리 분야에서 쌓아온 오랜 성과가 우리에게 안도감이자 동시에 환상을 안겨준 것은 아닌지, 결국 그 환상에서 깨어나 새로운 생태계와 전략을 갖추지 않는다면 미래는 더욱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상하이의 겨울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