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은 대우그룹의 창업자이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중견 무역업체에 입사해 국내 최초로 섬유제품 직수출을 성사시켰다. 1967년 31세의 청년 김우중은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실업은 1969년 호주 시드니에 해외지사를 설립한 한국 최초의 기업이 되었고, 셔츠와 원단 등을 글로벌 시장에 수출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대우그룹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2000년대에 네이버가 있었다면 1960년대에는 대우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고 평가했다.
1970년대 정부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에 맞추어 대우도 회사의 정체성을 변모시켰다. 한국기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대우조선해양) 등의 기업을 인수했다. 동시에 해외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남미의 에콰도르, 아프리카의 수단과 리비아 시장에 잇따라 진출했다. 수단의 경우 타이어 공장을 건설했는데 대우 스스로 해당 분야의 전문성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에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판단 하에 밀어붙였고 결국 수단 당국의 큰 호감을 샀다.
1990년대 초반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공식적으로 표방했다. 세계 20개국에 국가별 본사를 설립하고 TV생산 세계 1위, 자동차 분야 세계 10위 진입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TV시장 1위를 위해 프랑스의 톰슨 멀티미디어를 인수하려고 하자 전세계는 경악했다. 이름도 낯선 아시아 중진국의 기업이 선진국의 유명 기업을 인수한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무대에서 한번도 중심에 서 본 적이 없던 한국인들은 대우의 맹활약에 신바람이 났다. 1993년에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정부의 기조로 부각시켰다. 삼성, 현대, LG 등 대기업들은 경쟁하듯 세계 무대에 뛰어들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김우중의 자서전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재벌을 비판하던 운동권 대학생들은 대우 입사 후 세계경영의 첨병이 되었다. 김우중은 1년에 200일 이상 해외에서 머물며 대우의 글로벌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항상 노력과 열정을 강조했다. “노력은 안하고 자꾸 무언가 잘못됐다고 말하면 그건 웃기는 일입니다””오지에 가라고 발령을 내면 사표를 내는데, 그것을 견뎌야 합니다“”방법은 천 가지, 만 가지가 있습니다. 안하고 있을 뿐, 안되는 일은 없습니다“”어려울 때를 슬기롭게 대처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아무 것도 없던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상위 10%가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김우중은 청년의 해외 진출을 일찍부터 주창했다. 그는 창업가들의 글로벌 진출 및 청년 실업 해소를 위해 해외 진출 경험이 풍부한 선배들이 후배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유지를 받든 대우 출신 경영자들은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통해 세계를 경영하려는 젊은 인재들을 지원하고 있다.
요즘 MZ세대에게 대우라는 단어는 낯설다. 대우조선해양, 미래에셋대우, 위니아대우 등이 사명을 바꾸면서 대우라는 이름은 거의 잊혀졌다. 지금은 대우건설을 비롯해 4곳의 기업만 대우라는 이름을 사용 중이다. 창업자인 김우중에 대해서도 아는 이가 드물다. 그의 이미지도 ‘부실기업, 부정부패, 정경유착, 분식회계, 세금미납, 초호화도피’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장점과 성취는 잊혀지고 부정적인 이미지만 남았다. 재계에서 김우중이나 대우라는 단어가 금기어처럼 여겨지면서 창업생태계에서는 아예 들어볼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데이원부터 글로벌이었던 대우
최근 국내 창업생태계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글로벌 진출이다. 지금도 수많은 창업자들이 더 넓은 시장과 더 많은 기회를 찾아 출장길에 오른다. 막대한 세금이 국내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 사업에 지원되고 있으며, 한편으로 해외 기업의 유치를 통한 국내 시장의 글로벌화를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국내 스타트업이 해외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쿠팡이나 배달의 민족 같이 국내를 대표하는 창업 기업도 해외 시장에서 쓴 맛을 보고 철수하는 경우가 잦다.
대우의 성장과정은 해외 진출을 진행 중인 국내 스타트업 입장에서 좋은 본보기가 될 만하다. 내수 시장 독점이라는 과실을 누리던 경쟁사와 달리 대우는 시작부터 해외에서 매출을 만들었다. 해외시장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기회가 보이면 집요하게 포착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고객사 요청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1960년대부터 경쟁사의 공장을 인수합병하는 새로운 경영전략을 선보였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동유럽,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시장을 선도적으로 개척했다. 그리고 현지 바이어와 더 많은 소통을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현지 법인을 개설했다. 지금이야 당연한 일로 여겨지지만 1970~80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선구자의 행보였다.
물론 김우중의 시대와 지금은 많은 점이 다르다. 대우는 섬유, 가전, 자동차, 조선 등 제품(Product)을 국내에서 저렴하게 생산해 수출하는 방식으로 해외에 진출했다. 지금 국내 스타트업의 상당수는 IT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업을 영위 중이다. 높아진 GDP로 인해 가격도 저렴하지 않다. 게다가 서비스업은 상대적으로 수출이나 해외 진출이 여의치 않다. 인건비나 경제성장율 측면에는 과거가 더 좋았던 것 같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국가 이미지나 기술 및 정보 수준이 훨씬 향상되었다. 결론적으로 김우중의 시대가 지금보다 더 좋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는 없다.
김우중과 대우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어떻게 수없는 난관을 돌파하며 지속적인 성장을 구가했느냐일 것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그는 “직원들의 적당주의는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고 했다. 본인부터 해외 출장을 가면 어떻게든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투박한 영어였지만 몇 시간에 걸쳐 해외 바이어를 직접 설득했다. 창업주가 가장 일을 많이 하고, 성과로서 모범을 보이면서 부하직원들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법인을 설립한 해외에서는 주요 인사들과 친해지기 위해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술을 못 하는 체질이었지만 귀빈 접대를 위해 양주잔에 보리차를 넣고 마시며 친분을 다졌다. 하지만 모든 것을 창업자 혼자 해결할 수 없기에 인재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뛰어난 인재를 채용해 권한을 부여함과 동시에 막대한 책임을 부여했다. 대우맨들은 초년병부터 성실함과 부지런함이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에는 언감생심이었던 해외 유학을 1년에 몇십명씩 보내주기도 했다. 결국 대우맨들은 재계 곳곳에서 중요한 인물로 거듭났다. 셀트리온을 창업한 서정진 회장도 대우그룹 임원 출신이다.
우리는 성장과 혁신을 이야기할 때 여전히도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같은 미국의 사례를 주로 언급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의 상황은 미국과는 너무도 다르다. 미국의 사례는 참조만 해야할 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아니다. 좁은 국토, 모자란 자원, 비영어권 국가라는 엄혹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던 선배들의 선례를 배워야 한다. 이병철, 구인회, 정주영, 김우중 등의 창업자들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김우중과 대우그룹은 글로벌 진출의 실마리를 다수 제공했다. 세계경영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 그것이 글로벌 진출이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직면하고 있는 후대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