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투자(나는 그때 투자하기로 했다)에선 현업 투자자가 왜 이 스타트업에 투자했는지를 공유합니다.

불과 3년전인 2021년, 우리 모두는 팬데믹만 끝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라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 자신들의 이익과 건강을 희생하며 세계에서 가장 진보하고 철저한 방역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특히, 최전선에 있던 의료기관의 고생은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였다. 알베르 카뮈의 명저 ‘페스트’의 주인공 외과의사 리유의 고백은 그들의 헌신의 이유를 잘 정리한다.

“나는 다만, 이제 다시는 페스트에 전염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평화가 아니라면 적어도 떳떳한 죽음을 바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적과도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치사율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정부, 의료계, 그리고 온 국민의 단합으로 만든 최선의 방역을 해내던 그 어두운 시간이 오히려 기적의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대한민국은 짧은 허니문을 지나, 사회 곳곳에 오랫동안 숨어있던 부조리들이 튀어나오며 빠르게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고금리 환경으로 인한 가계부채위기와 부동산 시장침체, 최저 출산율과 고령화, 지역사회소멸, 제조업 필두의 핵심 산업 기업의 구조조정, 그리고 최근의 비상계엄사태로 나타난 정치 양극화까지… 마치 우리를 죽이지 못한 바이러스가 우리 사회를 몸 져 눕게하고 있는 것만 같다. 대한민국 벤처캐피탈 최고 호황인 2021년에 벤처캐피탈리스트가 되어, 근 10년내 최악의 불황을 겪고 있는 벤처업계 안의 나 역시 몸 져 눕고 싶은 마음일 때가 많았다. 벤처투자업에 대한 회의가 가득한 채, 의지로 스스로를 끌고가던 2023년 9월, 메디노드의 황선일 대표님을 만났다.

메디노드가 개발한 알약분류로봇 ‘PillBot’ /메디노드

◇매일 약사 맨아워 12시간을 대체해주는 알약분류로봇

메디노드는 알약분류로봇을 만든다. 매일 새로운 환자가 입원하고 또 퇴원하는 종합병원에서는 처방약을 회수하고 보관하고 처방하는 일이 반복된다. 알약을 그냥 버려도 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전문의약품 내복약 한 알의 평균 약제가격은 2,252원으로 절대 저렴하지 않은 가격이며, 병상 수 800개 운영 종합병원 기준 매일 4,000정이 반환된다. 이 알약을 모두 버리면 해당 병원의 연간 손실액은 20억원이 된다. 그래서 종합병원 약제부의 약사들은 매일 색깔도 모양도 비슷비슷하게 생긴 알약을 재분류하는 수작업을 한다. 약사 4명이 3시간 동안 분류하니, 맨아워 12시간이 매일 소모되는 것이다. 메디노드 알약분류로봇은 이 수작업을 자동화한다.

메디노드의 황선일 대표님을 처음 만난 서울상공회의소 IR컨설팅 행사에서 우연히 미팅을 했다. 황선일 대표님은 인하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한미약품에 입사해 기술영업으로 주가를 올렸다. 의료기기 영업을 하며 발견한 약제처의 어려움을 보셨다고 한다.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창업을 했고 R&D에만 3년을 소모했다고 하셨다. R&D 자금을 대기 위해 메디노드 팀이 외주개발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황선일 대표님은 마치 PillBot 출시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PillBot의 고객은 매우 정확히 정의되어 있었고, 2번의 장기 필드테스트를 통해 고객의 요구가 제품에 세심히 반영한 것이 눈에 띄었다. SW가 약한 일본 경쟁사 대비 확실한 기술우위도 있었고, 영업력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운용펀드청산을 위해 구주 세일즈에 열심이던 나는 메디노드가 PillBot을 파는 것 만으로 Exit이 가능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상장 예정이던 기업의 구주 조차도 유통이 어려운 시장상황이었고 나는 겁을 먹었던 것 같다.

메디노드는 과분할 정도로 나의 기대를 넘어섰다. 시드투자 유치가 잘 마무리되길 바라는 마음에 디캠프 디데이 출전을 권하였는데, 2023년 디캠프 최대 행사였던 ‘디캠프 올스타전 2023′에서 디캠프상을 수상했다. 통합 2위 정도라고 보면 되는데, 이 기세를 몰아 나와 캡스톤파트너스의 도움없이도 디캠프를 포함한 4개 기관에서 투자를 유치하고 TIPS R&D 수행 기업에도 선정되었다. 간간히 황선일 대표님을 통해 전해듣는 제품개발도 막힘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디캠프 올스타전 2023에서 디캠프상을 수상한 황선일 대표님(사진 오른쪽) /캡스톤파트너스 제공

◇의료대란에 막힌 판로, 그래도 베팅한 이유

시간이 지나, 2024년 7월에 다시 만나게 된 메디노드 팀은 동트기 직전의 어둠 속에 있는 듯하였다. 2024년 2월 시작된 의료대란의 여파로 주요 종합병원의 기기도입을 위한 예산편성은 올스탑 상태였던 것이다. PillBot 도입에 대한 현장테스트와 도입문의는 20개처가 넘었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의료대란으로 기기도입이 내년 혹은 내후년까지도 늘어질지 모르는, 투자판단을 내리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메디노드 역시 정말 많은 투자자를 대상으로 IR을 했지만, 투자라운드가 좀처럼 구성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병원약사님들과 이야기를 해보았다. 병원약사의 업무과부화 문제는 심각한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병상 수에 비례하여 약사를 의무고용하도록 법정기준이 존재하나, (상급)종합병원에는 법정기준을 초과하여 약사를 채용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외근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특히, 비수도권 (상급)종합병원에서는 법정의무비율도 충족하기 어렵고 시간외근무 역시 당연시되고 있다. 팬데믹 이후 급여수준이 높은 로컬 대형약국로의 이직이 증가하며, 각 병원 약제부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다. 약사님들이 오히려 자동화기기 도입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었다.

레퍼런스 미팅 후 점검할 수 있는 모든 항목에서 데이터를 요청했고, 메디노드 팀은 2주 넘게 나의 질문세례에 시달렸다. 내가 던진 수 없이 많은 질문에 메디노드는 명료한 전략과 데이터와 증빙으로 답했다. 메디노드는 PillBot을 만들고 팔 준비가 되어 있었고, 제품 생산 대금만 있으면 되었다. PillBot의 핵심기술인 딥러닝 알약인식모듈을 활용해, 조제검수기, 전자동 조제기 등 추가 제품 포트폴리오에 대한 계획도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선례와 같이, 이번 의료대란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은 의료인력의존도가 낮은 구조로 조정되며 자동화기기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가 발생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가설에 베팅하기로 했다.

기존 주주이신 신용보증기금의 참여로, 정말 감사하게도, 메디노드 Pre-A 투자라운드는 가까스로 완료가 되었다. 그리고 내년 2월, 또한 감사하게도, 첫 제품이 제값을 받고 판매가 될 예정이다, 그것도 일시불로. 메디노드가 그리는 계획의 1부능선을 막 넘었지만, 이 엄청난 맷집을 가진 팀이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는 강한 낙관이 생긴다. 대한민국 산업과 투자시장의 겨울바람이 슬슬 강하게 불어오기 시작한 지금, 나는 오히려 희망을 느낀다. 우리 스타트업들과 벤처캐피탈이 가장 앞서 겨울을 맞이했고, 추위를 이겨낼 각오와 준비가 끝났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많은 고통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해야한다. 대한민국 사회가 앞으로 처하게 될 수없이 많은 문제를 밀착하여 해결하고, 또한 새로운 평화의 시대에 주역으로 성장해 있을 스타트업들의 활약을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