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설계한 장비가 해외에 수출된 적이 있습니다. 제 성취가 회사를 넘어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반도체 장비는 해외 시장에서 ‘하이엔드’로 꼽힙니다. 그만큼 기회도 무궁무진하죠.”

한국폴리텍대학 반도체융합캠퍼스 반도체장비설계과의 안아인(40) 교수. /더비비드

해사한 얼굴에 털털한 말투. 그의 첫인상은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좋은 언니’였다. 실제 삶도 그랬다. 청년 세대에 전반적으로 깔린 패배주의가 안타까웠던 그는 그들의 멘토가 되기를 자처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다.

작은 체구에 반전이 있다. 기계공학 학사, 석사를 거쳐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자다. 10년 넘는 경력의 반도체 장비 설계자이면서,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의 CEO이기도 하다. 한국폴리텍대학 반도체융합캠퍼스 반도체장비설계과의 안아인(40) 교수를 만나 교육자가 되기로 한 계기를 들었다.

◇실무자도 3년 걸리는 일, 1년 만에 해낸 기특한 학생들
2022 융합프로젝트 경진대회 당시의 모습. /안아인 교수 제공

지난 10월 SK하이닉스, 동우화인켐, 코아시아세미코리아 등 반도체 기업 관계자 30여명이 한국폴리텍대학 반도체융합캠퍼스를 찾았다. 2022 융합프로젝트 경진대회 본선에 진출한 24개 작품을 보기 위해서다. 참가자들의 관심은 금상을 받은 ‘박막증착장비’(PE-CVD)에 쏠렸다. 반도체장비설계과, 반도체전기기스템과, 반도체융합SW, 반도체품질측정과 등 4개 학과 재학생 50명이 128시간에 걸쳐 진행한 융합실습 수업의 결과물이다. 경진대회에 참관한 한 기업체 담당자는 “전문가 집단도 장비를 개발하는 데 3년이 걸린다”며 “교육기관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장비를 불과 1년 만에 개발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안아인 교수는 프로젝트를 이끈 5인의 지도교수 중 하나다. 그는 기구 설계를 담당했다. 다른 역할은 학생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프로젝트를 위해 학기중엔 밤 시간, 방학 때는 종일이다시피 시간을 반납했는데요. 시간과 자원의 제약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부품을 잘못 선정했거나, 조립 중에 안 맞으면 수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학생들의 부담이 컸습니다. 옆에서 학생들이 느끼는 압박감에 공감하면서, 잘 해낼 수 있다고 다독였습니다. 힘들게 설계한 장비 조립이 완료되던 날 사진을 찍고 좋아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열패감에 젖어 있던 학창 시절, 한 줄기 빛이 돼 준 말
안 교수는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다. /더비비드

안 교수가 학생들을 유독 아끼고 감싸는덴 다 이유가 있었다. 누구보다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다. “개방형 자율학교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요. 학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은 스스로 꿈을 찾기 위해 매진했지만 꿈이 없었던 저는 무기력하게 있었습니다. 가족과 멀리 떨어진 기숙사 생활은 어려움에 외로움을 더했죠. 자존감이 낮아져 아무 목표나 목적 없이 지냈습니다.”

아버지의 추천으로 안성기능대학(현 한국폴리텍대학 반도체융합캠퍼스)에 입학했다. “자신감도, 목적의식도 없이 낙담하고 있던 제게 한 줄기 빛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진학을 상담해 주신 교수님께서 제게 ‘지금 해온 것도 대단하다. 노력했다. 고생 많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충격적이면서도 큰 위로가 됐어요. 가족에게도 듣지 못한 칭찬을 낯선 어른에게 들었으니까요. 나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회색빛이었던 세상이 장밋빛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제가 작은 성과만 내도 교수님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정서적 안정을 찾으니 공부에 재미가 붙더군요. 실무 위주로 공부를 하다 보니 이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이때부터 교육자를 꿈꾸기 시작한 것 같아요. 다독임을 받고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경험을 토대로 힘든 청춘들을 옆에서 독려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서울과학기술대 기계설계자동화공학부에 편입했다. “추상적인 개념을 형상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계 분야에 매력을 느꼈어요. 그중에서도 장비 설계에 재미를 느꼈어요. 장비의 개념적인 동작을 현실화해서 동작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죠.”

◇연봉 1000만원 올려서 이직한 비결
(왼쪽부터) 직장인 시절 안 교수의 모습과 작업 중인 안 교수. 그는 반도체 검사 장비 분야에서 10년의 경력을 쌓았다. /안아인 교수 제공

졸업 후 반도체 검사 장비 제조사에 취업했다. “첫 직장은 반도체 주요 부품인 ‘웨이퍼’ 검사 장비제조사였습니다. 웨이퍼는 반도체의 토대가 되는 얇은 판으로, 미세 공정이 필요한데요. 광학으로 불량품과 양품을 가리는 기계를 제작했어요. 저는 설계 담당자였는데요. 장비가 배치될 환경을 고려하면서 1000개 넘는 부품을 설계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성취감도 컸어요. 기계가 나와야 소프트웨어든, 전기든 적용할 수 있으니까요. 자긍심을 느끼며 일했습니다.”

학교든 직장이든 항상 남초 환경에 놓였다. 때때로 ‘여자라서 누군가가 도와줘서 일을 수월하게 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억울해하지 않고 실력으로 보여주기로 했어요. 제게 할당된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따지지 않고 그저 열심히 했죠. 서러운 일도 있었어요. 설계 1년 차일 때 도면 몇 백 장을 들고 구매팀에 갔는데, 구매팀 담당자가 도면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완벽한 도면을 가지고 오라’며 제게 도면을 던진 적이 있어요. 많이 놀랐고 속상했어요. 평소 언행에서도 저를 편협하게 보는 게 느껴지던 분이었거든요. 그렇다고 직속 상사에게 말하면 큰 분란이 생길 것 같아 일단 참았어요. 누구보다 열심히 해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엔지니어가 되고, 여성에 대한 편견을 지우겠다고 다짐했죠.”

현장 일이든 문서 작업이든 가리지 않으며 실력과 맷집을 쌓았다. 업계에서 이름이 알려지면서 여러 기업으로부터 이직 제의를 받았다. “첫 직장 입사 후 두 번 이직했는데요. 모두 스카우트 받아서 회사를 옮겼습니다. 감사하게도 이직 때 희망 연봉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제안받았습니다. 연봉을 1000만원 이상 올린 적도 있습니다.”

◇창업 결심한 뜻밖의 계기
(왼쪽부터) 폴리텍 재학 당시 박성용 교수와 촬영한 사진. 두 사람은 12년 후 강사와 청강생으로 다시 만났다. /안아인 교수 제공

회사나 협력사 관계자 사이에서 ‘잘 알려주는 사람’으로 평판을 쌓았다. 다양한 강연 기회가 생겼다. “신입사원 대상 강의를 비롯해 몇 차례의 강연을 진행하며 ‘가르침’의 재미에 눈떴습니다. 소소한 강연 경험이 쌓이다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에서 강의를 하게 됐는데요. 이 자리가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능력교육개발원 강의로 이어졌습니다. 한국폴리텍대학 교원, 공업 고등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죠.”

그 자리에서 12년 만에 한국폴리텍대학 시절의 스승이었던 박성용, 황봉갑 교수와 재회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로 시작했는데 강사와 청강생으로 다시 만났어요. 교수님께서 ‘학교에 와서 후학을 양성하라’고 하시더군요. 마음이 동했지만 아직은 현장에서 실무 경험을 더 쌓고 싶어서 고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 엄청난 번아웃에 시달렸어요. 인내하며 참았던 모든 게 터져버렸죠. 기술연수 때 만난 교수님들을 찾아가서 하소연을 했더니 지금이야말로 강연을 할 때라며 같은 제안을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한국폴리텍대학 시간강사로 그리운 모교를 찾았습니다.”

안 교수는 강사 일에 집중하기 위해 장비 제조업체를 창업했다. /더비비드

강사 일에 진심이 되자, 기존의 일과 강의를 조율해야 하는 난제가 닥쳤다. “당시 재직 중인 회사의 양해를 구해서 주 4일만 근무하고, 나머지 하루만 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요. 설계 실무자가 매주 하루 빠지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더군요. 제가 강의하는 날 예상하지 못한 이슈나 회의 등이 발생해 고객사나 동료들이 일정을 변경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거든요. 부담이 쌓이니 강의와 일을 동시에 하려면 회사의 대표가 되는 것 밖에는 방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접 일정을 조율할 수 있으니까요.”

2019년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 ‘포어웍스’를 설립했다. 덕분에 강연 시간은 1.5일로 늘어났다. “무모하게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과거 팀장으로 모셨던 분이 한국기계연구원의 연구원 되셨는데요. 설계 외주를 맡길 회사가 마땅히 없다며 창업하면 일을 맡기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좋은 납품처를 확보한 덕에 용기를 낼 수 있었죠. 그렇게 창업을 했더니 과거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연을 맺었던 분들이 일을 주겠다고 연락을 해왔어요. 도움을 요청했을 때 흔쾌히 응해 주신 분들도 많았어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만난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절감했죠. 이 일을 계기로 제자들에게 ‘외주 업체 함부로 대하지 마라’,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라’, ‘모든 사람에게 좋은 태도를 보여야 한다’ 강조하게 됐습니다.”

◇제자가 엉뚱한 일해도 혼내지 않아요
(왼쪽부터) 석사 졸업 당시의 모습과 한국폴리텍대학 반도체융합캠퍼스 제자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안아인 교수 제공

점점 제자들에 대한 마음이 커졌다. 아예 교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2020년 경기대학교 일반대학원 기계공학과 석사 과정에 진학한데 이어 동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중이다. 올해 한국폴리텍대학 반도체융합캠퍼스 반도체장비설계과 조교수로 정식 임용됐다. 반도체융합캠퍼스는 반도체설계, 반도체장비설계, 반도체융합SW, 반도체전기시스템, 반도체공정장비 등 반도체 공정에 수반되는 모든 직무를 기준으로 학과를 두고 있다.

스스로를 ‘제자를 짝사랑하는 교수’라 부른다. “시간 강사 시절 일주일에 하루만 나오니 학생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웠어요. 사실 교수가 되기로 마음먹은 덴 기술적인 이유보다는 심적 동기가 커요. 학생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싶어서 온라인평생교육원에서 상담 교육 이수까지 했어요. 지금도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데 신경 씁니다. 학생들이 기술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해도, 예컨대 일반적인 가공기계로 제작할 수 없는 형상으로 설계를 해도 일단 ‘잘했다’고 합니다. 그 후 ‘너무 앞선 아이디어니 현실적인 것을 알려주겠다’며 답을 유도하죠. 정답을 알려주기 위해 기죽일 필요는 없어요.”

그의 교육철학을 요약한 키워드는 ‘창의성’, ‘실무’, ‘즐거움’이다. “창의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방법, 그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모든 과정은 ‘사회생활’에 입각해서 지도해요. 실무에 투입되었을 때처럼 반도체 장비에 적용 가능한 부품과 모듈을 설계하게 하고, 기술 문서 작성까지 교육하죠. 제조 원가 관리하는 법, 부품 구매하는 법 등 회사에서만 배울 수 있는 업무도 가르쳐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즐거운 학교생활입니다. 공학은 결코 쉽지 않은 분야입니다. 제자들이 끈을 놓지 않고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제자들의 눈높이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어요.”

◇직장 대신 직무를 보세요
안 교수는 ‘직장’이 아닌 ‘직무’를 보라고 강조했다. /더비비드

취업 준비생과 제자들에게 ‘직장’이 아닌 ‘직무’를 보라고 강조했다. “유명 기업의 적성에 맞지 않는 직무로 입사하는 것 대신 작은 기업의 기술자로 취업하라고 조언합니다. 작은 기업이라도 직접 설계를 하면서 실력을 쌓으면 뛰어난 기술자로 성장할 수 있거든요. 몸값을 올려서 더 큰 회사로 이직할 수도 있고요. 실제로 작은 회사에서 출발해 우직하게 일한 결과, 좋은 조건으로 이직한 제자도 있습니다. 그 제자가 큰 인센티브를 받아서 현금으로 차를 뽑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형용할 수 없이 기쁘고 대견했어요. 핵심은 성장할 수 있는 직무를 택하는 것입니다. 내게 어떤 직무가 맞을지 깊이 생각한 후 사회에 나왔으면 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참는 내면의 근육을 키울 것을 당부했다. “요즘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란 말이 유행어처럼 도는데요. 10가지 일이 주어졌을 때 그중 5가지는 하기 싫은 일일 수도 있어요. 불편한 순간을 감내해야 진정한 엔지니어로 거듭납니다. 저 역시 한때는 수학, 물리, 역학이 무척 하기 싫었는데요. 프로가 되기 위한 관문이니까, 필요한 과정이니까 묵묵히 하다 보니 재미가 붙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원까지 진학했고요. 어떤 일이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요소가 있습니다. 이를 극복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