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은행 자동화기기(ATM)에 5만원권 수급사정이 여의치 않아 가급적 1만원권 인출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있다./연합뉴스

한국은행이 10장을 찍으면 3장만 돌아올 뿐 7장은 개인 금고나 지갑, 회사 캐비닛 속에 숨어 돌아오질 않고 있다. 5만원권 얘기다.

코로나 이후 국내에서 5만원권 환수율이 30% 밑으로 뚝 떨어진 가운데,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 호주 등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고액권일수록 심했다. 코로나로 이동이 제한되고 경제가 멈추는 위기상황에선 ‘현금이 왕’이라는 사람들의 심리가 공통으로 작용한 결과다.

◇위기엔 ‘현금이 최고’…각국, 화폐발행잔액 코로나 이후 2~3배 늘어

27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코로나 19가 주요국 화폐 수요에 미치는 영향 및 시사점’을 보면 주요 8개국(미국, 유럽연합, 캐나다, 일본, 중국, 호주, 뉴질랜드, 스위스)에서 올 3월 코로나 확산 이후 화폐수요 증가율이 코로나 이전 대비 2배 이상 높아졌다. 유럽연합과 캐나다, 일본은 화폐발행잔액 증가율이 2019년 대비 최고 1.9배, 미국, 중국, 호주, 뉴질랜드, 스위스는 최고 3배에 달했다.

화폐발행잔액이란 각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돈의 총량에서 다시 중앙은행으로 환수된 돈을 뺀 나머지를 말한다. 바꿔 말하면 가계나 기업, 금융기관 등 민간 경제주체들이 가진 돈이다.

우리나라의 전체 화폐발행잔액 증가율은 작년 이맘때 7%대에서 현재는 15~16% 수준으로 높아졌다.

각국 화폐발행잔액 증가율./한국은행

미국도 작년(3~8월)에는 화폐발행잔액이 5% 수준이었는데, 올해(3~8월)는 평균 13%로 훌쩍 뛰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때(화폐발행잔액 최고 12%)보다도 코로나 이후 현금 확보 수요가 더 많다. 코로나 발발 이후 락다운(Lock-Down·이동 제한 등 전면 통제) 조치의 일환으로 일부 시중은행 지점과 현금인출기를 폐쇄하면서 사전에 현금을 비축하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일부 금융기관 창구에서 거액의 현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이 몰리자,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현금을 인출하는 것보다는 은행에 예치하는 게 안전하다”는 보도자료를 내며 진땀을 빼기도 했다.

미국 연준(Fed)의 소비자 지급수단 조사에서도 코로나 이전보다 민간의 거래용 현금 보유가 17%, 예비용 현금 보유는 88%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코로나 이후 현금 보유를 늘렸다고 답한 응답자의 경우, 코로나 이전에는 예비용 현금으로 평균 178달러를 갖고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 937달러를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코로나 이전엔 178달러 가졌던 미국인들, 지금은 937달러 보유

우리나라에서 5만원권 수요가 폭증한 것처럼 유럽에서는 200유로권, 일본에서는 1만엔권 수요가 가장 많이 늘었다. 예비용 현금을 보유하려는 사람들이 보관의 편의성 측면에서 고액권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에서는 4단계 봉쇄령(3월25일)이 내려지기 직전인 지난 3월 중순경 며칠 동안 연간 평균 수요량에 육박하는 현금이 시중은행을 통해 인출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뉴질랜드 중앙은행이 “어떤 상황에서도 화폐 수요를 충족할 충분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해야 했다.

한국은행도 5만원권 환수율이 30% 밑으로 떨어지자, 5만원권 제조 발주량을 전년보다 3배 이상 크게 늘리고, 5월에는 이례적으로 2조원어치를 추가 발주하기도 했다.

한은 발권국 화폐연구팀은 “재난 등 위기 시에는 가치를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는 현금에 대한 신뢰가 다른 비(非)현금 지급수단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