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으로 일하다 4년 전 명예퇴직한 박모(60)씨는 최근 한 시중은행을 찾았다. 노후 자금을 관리하기 위한 신탁(信託) 상품에 가입하기 위해서다. 단순히 높은 수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재산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주고, 세상을 떠났을 때 남은 자산처리까지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은 은행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저금리 시대라 마땅히 수익을 낼 만한 투자처도 없어서 은행 신탁에 재산을 맡긴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 하반기 출시된 은행 신탁 상품 / 그래픽=최혜인

워낙 수익률이 낮아 미운 오리 새끼 취급받던 은행 신탁이 명예회복에 나서고 있다. 은행들은 최근 새로운 신탁 상품을 잇따라 출시하며 고객 유치에 나섰다.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에만 은행권에서 6개의 신탁 상품이 출시됐다. 신탁(信託)은 말 그대로 ‘믿고 맡겨달라’는 취지의 금융 상품으로, 은행은 고객들이 맡긴 돈을 채권, 주식, 부동산 등에 투자하고, 관리·처분까지 해주는 일종의 자산 관리 서비스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수익률이 워낙 낮다 보니 과거엔 아는 사람만 가입하고 인기가 시들했다”며 “그런데 요즘은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자금 운용처가 마땅치 않고, 상속과 증여 문제까지 해결하려는 수요가 몰리면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기준 은행 신탁 수탁액은 496조원으로 작년 말보다 16조원 늘었다. 은행 신탁 수탁액은 2018년부터 매년 10%대의 증가세를 이어오고 있다.

기업은행이 10월 말 출시한 ‘IBK안심상조신탁’은 상품이 나온지 한 달여밖에 안 됐지만 가입자 수가 5000명을 넘어섰다. 이 상품은 최소 5만원에서 최대 500만원까지 납입할 수 있다. 중도 해지 수수료는 없고, 본인 유고 시엔 상조 회사 서비스를 15%가량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수탁자인 은행이 납입 금액으로 직접 상조 비용을 결제해준다. 납입액이 350만원 이상이면 배우자, 직계존비속 유고 시에도 할인된 가격으로 상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절반가량이 50대 이상 가입자이지만 30대 이하 가입자도 28%나 된다”고 말했다.

KB국민은행이 출시한 ‘KB내생애신탁’ 역시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최소 가입 금액 3억원 이상인 이 상품은 건강이 악화될 땐 의료비나 생활비를 지급받을 수 있다. 사후엔 상속이나 기부 등 자산 처리도 은행이 해준다. 통상 신탁 상품이 국채 등 초(超)안전자산에 투자되는 것과 달리, 이 상품은 가입자가 투자처와 방식을 정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이 상품 출시 전에도 상속과 증여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상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지금처럼 저출산·고령화·저금리 기조가 이어진다면 믿을 만한 금융기관에 자산을 맡기려는 수요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하나은행이 출시한 사전증여신탁은 신탁 상품의 낮은 수익률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 상품은 상장지수펀드(ETF)를 활용해 지수, 채권, 금 등 대체 자산에 분산 투자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연이어 터지고 있는 사모펀드 사고로 비이자 수익원이 줄어드는 은행 입장에서 신탁 상품은 새로운 수익 창출원”이라며 “일본 신탁 시장이 GDP의 2배가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GDP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한국은 성장 여력이 더 많다”고 밝혔다.

금융 당국은 신탁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제도 개선을 준비하고 있다. 이르면 내년 구체적인 방안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앞서 당국은 지난 2017년 ‘금융개혁 추진과제’를 발표하면서 신탁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도 최근 신탁 시장 확대에 대비한 연구 용역을 발주하면서 시장 진출을 저울질하고 있다.